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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14) 귀신 씨 나락 까 먹는 소리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11-10 조회수1,029 추천수10 반대(0) 신고

2005년11월10일 목요일 성 대 레오 학자 기념일 ㅡ지혜서7,22-8,1;루가17,20-25ㅡ 

 

         귀신 씨 나락 까 먹는 소리

                                            이순의

 

 

 

 

하도 이상헌 전화가 한 통 왔는데.....

반가운 마음은 오간데 없고 소름이 끼처서 다시는 받고 싶지 않다.

 

친정 아버님께서는 마을의 윤장로님과 친하셨기도 하지만 외가쪽으로는 친척간이기도 하셨다. 성당에는 발걸음도 해 본적이 없으셨지만 장로님과의 오랜 친분은 성서의 이치에 대하여 어느만큼은 알고 살아오신 분이시다. 그런데 죽을 병이 들어 목숨줄이 오락가락하였을 때도 아버지는 장로님을 따르지 않으셨다. 따를 수 없어서 죄송하다고 극진히 사과를 하셨다.

 

<우리 큰 딸이 성당에 다니니까 자식들을 하나로 합하여 사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천주교를 따를 것이요.>

 

그렇게 하여 아버님은 대세를 받고 고백성사에 영혼을 위한 십일조 헌금까지 손수하시고 주님성전에 드셨다. ※참고; 묵상글-(48) 아버지의 본명축일※

그런데 걸려 온 전화는 우리 친정 아버지의 혼을 불러다가 무당의 신당에 모시고 있다는......

하도 해괴하여 말을 섞지는 않았지만 그러므로 나더러 그 무당을 알아모시란다.

 

내 형편이 아무리 우숩기로서니.... 나에게 그렇게 잘 키워서 무녀가 된 딸을 앞으로는 잘 알아보아야 한단다.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딸이란다. 그리고 그 딸이 내 친정아버지의 혼령을 불러서 늘 대화하고 잘 모시고 있단다. 이렇게 끔직한 전화를 받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당장이라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대로 주님 뜻을 이루어 가신 내 아버지의 영원복락을 감히 그 따위로 씨부렁거리느냐? 귀신이 씨 나락을 까먹는 소리하고 자빠졌느냐?>고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러느냐고 알았다고 어서 말을 끝내고 싶었다. 그 말을 내 아들에게 하였더니 <정약용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장 강론을 하시고!

 

곰곰히 생각하고 또 생각을 하다가 묵상글로 옮겨 적어본다.

가족들에게 알릴까도 생각을 해 보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의 입장이 다 다른 위치에서 생각하고, 사람의 감정이 다 다르므로, 녹음을 해 놓은 것도 아니고..... 하여 그냥 말았다. 미신을 따른다는 말은 들었지만 무녀가 되었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었고.... 혹시 누군가 그 말을 내게 해 주었다고 해도 흘려들었을 것이고.....

 

그런데 우리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고 죽는 나에게 감히 잘 키우신 무녀 딸을 알아서 대우해 달라는.......

하도 기가 막혀서......

잘 키운 딸은 내가 얼마든지 내 형편 안에서는 대우하고 우러르고 사랑까지도 해 줄 수 있으나 무녀로 키운 딸은 더 이상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본 적도 없고 알았던 적도 없는 사이로 단절할 것이다.

 

복채들고 찾아오는 부자들도 많을텐데 왜 하필이면 지질이도 돈도 없는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한 까닭이 무엇인지? 알 필요도 없지만!

 

정신이 오락가락하실 때도 우리 친정 아버지는 고해성사를 준비하신 분이시다. 혼령이라도 그 따위 귀신 씨 나락 까막는 소리에 홀까닥 넘어가실 성품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어디서.......

더구나 우리 아버지는 광주대교구 성직자 묘역에서 주교님들과 신부님들과 수녀님들과 또 여러 평신도들과 찬송을 하며 매일이 즐거우신데 별 꼴갑스런 소리를 다 들어본다.

 

아무리 갈데가 없어도 우중충한 그림쪼가리 나불거리는데서 머무실 양반이 아니다. 그분이 뭐가 아쉬워서 그 따위 구천을 떠도는 잡동사니들이 모인 초라한 방구석에 기거하겠는가? 그런데나 기웃거리게 하려고 우리들의 중전마마이신 큰 새언니가 그토록 정성을 들여서 아버지를 모셨겠는가? 성 프란치스코께서 들으시면 배꼽이 하품을 할 일이다. 웃기고 있네.

 

정성을 다 하여 아버님을 모시는 큰 오빠랑 큰 새언니가 아시면 상종못 할 인간들을 당장에 내치실 것이다.

<우리 자식들은 천주교를 믿으라고 하신 아버지의 유지를 절대로 받들어야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전부 이단이며 아는 바가 없다.>라고 선포하실 분들이고, 이미 암묵적으로 선포 되어있다.

 

제 자식이야 저 알아서 제 입으로 잘 키웠다는 무녀를 만들었으면 저나 받들어모실 것이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받들어 모시는 나는 내 자식을 내 알아서 키웠으니 내 알아서 내 새끼 받들어 모시면 되고! 

살다보니 별 귀신 씨 나락 까 먹는 소리를 다 듣고.

귀신이 씨 나락을 아무리 열심히 까 먹어봐라. 그게 까 지는가.

 

하느님 잘 믿고!

죽은 아버지 뿐만 아니라 살은 어머니꺼정 잘 모시고, 이렇게 가난한 막내 동생 뿐만 아니라 혼자된 동생꺼정 잘 다스려 일구시는 우리 큰오빠랑 새언니네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복 뿐이드라. 우리 큰 언니도 그렇고 작은 언니도 그렇고 하느님 잘 믿으니께 다 잘만 되드라. 나야.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께 그 계획을 이루실려고 주시는 시련이고.... 또 나는 가난하고 시련이 많아도 남편 있고 자식 정상적이로 키우고.... 다 하늘이 주신 영광일세! 알렐루야! 아멘!

 

사랑하는 주님께서 나와 친정 가족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는구나.

주님께서도 수난 전에 마귀들의 유혹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마귀들의 시험을 받았구나. 주님께서는 나에게 성령을 주셨으므로 이 묵상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을 알리시는구나! 알렐루야. 아멘! 주님께서 마귀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수난의 길을 기꺼이 가신후에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부활의 영광을 영원히 영원히 믿~습니다. 알렐루야! 아멘!

 

ㅡ사람들이 너희에게 '보아라, 저기있다.' 혹은 '여기 있다.' 하더라도 찾아 나서지 마라. 루가 17,23ㅡ

 

회개하라.

ㅡ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소원입니다.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주십시오.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은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부자는 다시 '아브라함 할아버지,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루가17,27-31ㅡ  

 

 

 

2004년1월24일토요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 학자 기념일

 

    (48)아버지의 본명축일

                ㅡ기적ㅡ

 

 

오늘은 돌아가신 친정 아버지 이프란치스코의 본명축일이자 큰언니 살레지아의 축일이다.

전통 유교의 엄격한 가부장적인 집안에 천주교 제1호로 효시가 된 사람은 큰언니였다.

큰언니가 시골 여중에서 도시로 고등학교를 가게 된 것은 그 시절의 농촌 마을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가톨릭 학교인 살레지오 여고를 가게 된 것이다. 그것이 곧 바로 신앙으로 연결 된 것은 아니다.

 

외국을 가게 된 큰 언니가 이국의 삶을 신앙에 뿌리를 두면서 시작 되었다. 살레지아라는 세례명으로 주님의 선택을 받아 친정 가문에 이례적인 종파를 형성시킨 것이다. 큰언니는 그 때나 지금이나 집안에 천주교를 알린 신앙의 선조답게 진실한 믿음 안에서 열심한 신자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수녀님을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친척 오라버니들도 계셨고, 아무튼 천주교에 대해서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되었던건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은 친정 대소가의 상당히 많은 수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또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지는 갑작스런 병으로 돌아가셨다. 80년 5월에 대학병원에 입원중이셨는데 군인들에 의해서 걸을 수 있는 모든 환자는 강제퇴원을 당하고, 그해 음력 9월에 가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으로 주님의 백성이 되어 천국생활을 사작 하셨다. 그 때도 의견이 분분 했었다. 집안의 어른들은 성당에 다닌다는 핑계로 액막이 굿 한번 못 하고 죽게 생겼다고 꾸지람이 대단하셨었다.

 

지역의 유지셨던 아버지와 친분이 깊으신 장로님은 오셔서 아버지를 당신이 세우신 마을 교회로 인도하고 싶어서 매일매일 기도로 일관하셨었다. 그런 혼란 속에서도 어버지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우리 큰 딸이 성당에 다니는디 어느 종교든지 다 좋지만 가정이 하나여야 된께 나는 우리 큰딸하고 합할랍니다."

 

집안의 노여움과 반발이 심하여서 어머니는 당사자인 아버지 몰래 큰 굿쟁이에게 거금을 주고 굿할 날을 받아 놓았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아시는분 처럼 굿 하기 전 날 아버지의 상태는 더 나빠지셔서 서울로 이송되고 말았다. 그래서 굿은 계약금만 포기하고 못 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신자되기는 그렇게 힘이 들었었다. 그 때 문중 전체에 신자는 큰언니와 큰형부 뿐이었다. 그 나마 형부는 미국에 유학중이었으니 신자는 큰언니와 자박자박 걸음마를 하는 어린조카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주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아버지는 세례를 못 하시고 떠나시지 않았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든다.

결국 서울대학병원에서 아름아름으로 해서 연희동 본당의 레지오 팀이 왔었고 다음에 신부님께서 오셔서 세례와 안수를 주신걸로 알고있다. 아버지는 아프시기 전에 성서를 읽어 보신적도 없고, 성당에를 가보신적도 없고, 기도문을 봉독하신적도 없다.

 

외국에서 4년여를 수고하고 돌아온 큰딸에 대한 각별한 배려만이 아버지가 하신 유일한 신앙의 행위셨다.

주일이면 곧 시집갈 딸을 어린아이 깨우듯이 깨워서 믿는데 소홀함이 따르면 안된다고 꼭 주일을 지키게 하셨고, 주일 헌금을 꼭꼭 챙겨서 따로 주시는 한결같은 정성에는, 그 때의 그 모습을 보고 자란 내가 지금 내 아들에게 그대로 하며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아버지의 첫 고해이자 마지막 성사는 더욱 신비스럽다.

신부님만 모셔오라고 돌아가시기 몇일 전부터 야단이 났다. 왜 신부님이 이렇게 안오시는지 잠도 안주무시고 신부님만 찾고 계셨다. 그런데 시골 본당 신부님께서 피정중이신(광주 민주항쟁 문제로 몇일간 교구대책모임에 참석중이셨다고함)것이다. 어쩌면 아버지의 첫 고해이자 마지막 성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두가 긴장되고 있었다. 그 무렵 사촌 오라버니께서 세례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열심한 본당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어찌하여 본당신부님과 연락이 되었다.

 

정말로 어렵게 아버지의 첫 고백이자 마지막 고해가 이루어 진 것이다.

가족 모두가 물러나고, 오신 신부님과 아버지만의 독대가 조용히 안방에 누우신채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참 후에 모두 들라는 명이 내리셨다. 모두 빙둘러 앉았는데 큰아들더러 신부님께 십일조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큰 오빠는 십일조를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 죽고 나서 너희들이 신부님께 약속을 안지킬지 모르니 종이로 쓰라고 하셨다. 오빠는 다급하게 시키는 대로 써서 신부님께 드렸으나 아버지는 읽어 보라 하셨다. 오빠는 읽으셨고 지천을 들었다. 그건 바르게 쓴 것이 아니니 드리지 말고 아버지의 말을 받아 쓰라는 것이었다.

 

뼈에 가죽만 남은 아버지의 마지막 사투치고는 너무나 강하고 단호하셨었다. 앉지도 못하고 누우셔서 아주 가는 소리로 행하시는 모든 상황이 빈틈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큰오빠는 아버지께서 불러 주시는 대로 받아써서 신부님께 드리려다가 또 지천을 들었다. 아버지는 읽어 보라는 것이었다. 오빠는 그대로 읽어 드렸고 아버지는 그제서야 신부님께 그 종이 한 장을 드리게 하고 한가지 부탁을 하셨다..

"신부님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기적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종부성사인 고해의 보속으로 십일조를 헌금하며 영혼을 사제에게 부탁하시는 아버지셨다.

신부님께서는 열대의 미사와 기도를 약속하시고 죽음을 앞둔 영혼의 십일조를 들고 떠나셨다.

그 날 이후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의 마지막 몸부림을 하실때까지 이틀동안 말을 하지않다가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 돌아 가셨다.

 

이끄시던 사업이 있어서 살아갈 사람으로서의 걱정이 많았던 어머니는 자꾸 부탁을 하셨다. 큰아들이 오면 이런말을 해 주시라고. 그리고 아버지는 알았다고, 자네한테 미안한 세월을 살았다고 사과를 하며 허락을 하신다. 그러나 큰오빠가 퇴근을 하고 돌아와 앉으면 아버지는 그러셨다.

"이미 신부님한테 고백 다 했는디 무슨 할말이 있당가."

그렇게 어머니께서 시키신 말은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섭섭하셔라고 하셨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진심이셨다. 성당에 가 보신적도 없고, 고해라는 교리를 들어 보신적도 없고, 성서를 읽어 보신적도 없는, 아버지의 고해성사가 모든 가족들을 놀라게 한 것은 사실이었다.

 

대지 1950평의 친정집 뜰에서 장례미사가 이루어졌다.

너무나 많은 조문객들이 발디딜 틈이 없었으나 읍내 성당에서 면단위 마을에 출장을 오신 미사는 외인들 앞에서 당당하고 장렬하게 이루어졌었다. 친척들의 반발을 막으려고 상은 상대로 차려 놓고 그 앞에 제단을 만들어서 대미사를 보여준 것이다.

시골 마을에서 천주교 미사를 처음 보는 사람이 대다수였고 친척들 또한 그렇게 장엄하고 성스러운 미사를 처음 보고 감동을 받는 눈치였다.

"저렇게 제사도 허락해 주는 교회라면 누구나 다닐 수 있것네." 라는 수근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렸었다.

 

큰딸의 종교를 지켜주려고 병중에도 집안의 반대를 이겨내시더니 돌아가실 때는 진정한 신자의 모습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부름을 받으신 아버지! 우리가족이 친척들에게 선교를 하려고 애쓰거나 노력을 한 적은 없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던 80년 성탄에 우리가족 모두는 세례를 받았고 그 후 친척들은 알게 모르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신자가 되어 있었다. 그 은덕으로 나도 오늘 여기서 주님을 사랑하며 살고 있다고 묵상글을 쓰고 있다.  나도 죽을 때 아버지처럼 멋진 고해를 선택받는 죽음이고 싶다. 너무도 짧았지만 아버지처럼 진정한 신앙의 모습으로 천국에 드는 날을 맞이하고 싶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럽기 그지없는 아버지시다.

 

아버지는 문중산에 묻히신걸 거부하시고 작년에야 교회묘지 납골당으로 가셨다.

"나는 땅에 묻지말고 양놈들처럼 아파트에 넣어주라."

생전에 TV를 보시면서 하시던 바람이 20여년도 훨씬 더 지난 뒤에야 이루어졌다. 우리의 장묘문화가 납골당이 없었으므로 문중산에 모셨는데 작년에 큰 오라버니의 희생과 결단이 내려져서 광주교구 담양묘지의 납골당에 모셨다. 이제야 모두가 편안한 마음이다. 제대로 된 아버지의 자리에 모신것 같다.

 

"아버님, 아파트가 매우 호화롭고 깨끗해서 좋으네요. 친구도 많이 사귀시고 즐겁게 지내세요. 산에 계실 때보다 저희들도 더 자주 찾아 뵐께요."

큰 올케언니는 맏며느리로서 안도의 인사를 드렸다. 딸자식인 우리는 큰올케 언니께 찬사를 보낸다.

 

<어버지 축일 축하합니다. 큰언니 축일 축하해! 그리고 나에게 주님을 따라 살게 해 준거 너무 고마워! 우리 큰언니!>

 

ㅡ사울과 요나단은 살았을 때 그렇게도 정이 두텁더니, 죽을 때도 갈라지지 않았구나. 독수리보다도 날쌔고, 사자보다도 힘이 세더니.

이스라엘의 딸들아, 주홍색 옷을 입혀 주고 그 옷에 금장식을 달아 주던 사울을 생각하고 통곡하여라. 사무엘하1,23-24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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