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와 사마리아 여자 』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 요한 복음 4, 6-7 >
예수님의 갈증과 사마리아 여인의 갈증.
두 사람은 갈증 때문에 우물가를 찾아왔고,
그 곳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먼 길에 지치시고 목마른 예수님은
어두운 행실로 소외와 배척을 받으며 살아온 그녀에게
아무런 편견이나 거리낌 없이, 한 모금의 물을 청하십니다.
부도덕하고도 행실 나쁜 그녀는
어느 누구에게도 인간적인 따뜻한 신뢰와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께서 물을 청하시는 행위는
인격적이고도 인간적인 따뜻한 신뢰와 관심이었습니다.
그 신뢰와 관심이 결국,
사랑받을 수 없는 상태로 떨어진 그녀에게
잃어버린 인간성과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고
다시 사랑받는 존재로 그 여인을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이 복음을 묵상하다 보면
삼십년 이상을 이혼, 폭력, 불륜, 사생아 출산,
알코올과 담배 등으로 거친 삶의 언저리에서 방황하다 돌아온
오십대 후반의 어느 자매 님이 생각납니다.
그 분은 이혼에다 불륜으로 인한 사생아등의 조당 문제로
성당 문턱이 너무 높아 보여 주님으로부터, 성당으로부터,
교우들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인생이라는 자격지심에
더욱 더 자포자기 삶을 사시다 황혼의 나이가 다 되시어
어떤 계기로 인해 주님 품에 돌아와 지금은 너무도 온순하고
착한 주님의 딸로 변화되신 분이시랍니다.
오랜 냉담 중에도 그 분 마음 한 구석엔
자신은 가톨릭 신자이고 비록 이렇게 사마리아 여인처럼
부도덕하고 문란하게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주님께 돌아가고 싶다는 "귀향심"이 있으셨다고 하더군요.
주님께 돌아가고 싶다는 바로 그 마음이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영적인 갈증"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 자매 님과 사마리아 여인처럼, 비록 자신이 살아온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비참하고 낯부끄럽다 하더라도
주님에 대한 "영적인 갈증"을 느낄 수 있다는 그 사실은
매우 중요하지 않나 합니다.
영적인 갈증이란 ,
절망 속의 한 줄기 빛,
바로 성령의 빛줄기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이 아니련 지요.
그 빛을 의식하고 그 빛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우리도 언젠가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처럼,
또, 오랜 세월 냉담하다 돌아온 자매님처럼,
불멸의 연인(戀人)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처럼
갈증으로 목이 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대한 갈증으로 목이 타는 것처럼,
예수님 또한 저희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갈증으로 목이 타고 계신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도 아주 간절하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청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갈증은, 바로 우리들의 사랑을
애타게 기다리시고 목말라 하고 계심이 아니련 지요.
오늘, 목마른 예수님께 물 한 잔 드리고 싶지 않으세요?
바로 그건, 사랑이 필요한 우리 이웃들에게
따스한 위로와 진심이 담긴 작은 배려의 물 한 잔을
드리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예수님의 목마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많은 나를,
절망하고 있는 내 이웃을
사랑해 주시는 마음이십니다.*^^*
어떤 것은 사랑받기에 가치가 있다.
이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스럽지 않은 자를 사랑하심으로써
나를 사랑스러운 자로 만들어 주셨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받기에
누구나 예외없이 가치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백할 수 있다.
"우리는 가치있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받기 때문에 가치있습니다." 라고.
< 차동엽 신부님의 엄마 하느님 중, 평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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