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요한 호수가 되어"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님 강론 말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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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06-01-02 | 조회수874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2006.1.2 월요일 성 대 바실리오와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고요한 호수가 되어"
몇 해 전, 삶이 아주 고단했을 때 써놓고 위로 받은 ‘호수가 되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나무에게
아예
하늘향한 무수한 나뭇가지들, 하느님 찾는 수도자들처럼 고단해 보였습니다.
‘하느님 찾는 사람’의 노력만 생각하다가
이미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 이게 성탄의 신비요,
아마 다음 시편 말씀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비상한 하느님 체험이 아니라, 이런 축적된 체험의 보고(寶庫) 있어 진정 부자요 마음의 순수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요한 1서의 말씀, 확연히 이해됩니다.
매일 매순간이 처음입니다.
이때 참으로 넉넉한 내적 공간인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물게 됩니다. 바로 이게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고 매일 미사 안에서 그대로 실현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게 주님 머무실 수 있는 마음의 내적 공간입니다. 이런 내적 공간에 하느님 현존으로 충만할 때 진정 부자이고,
하느님 잊을 때 내적 공간은 오만 잡생각으로 채워져 복잡 혼란하고,
과연 넉넉한, 하느님 현존으로 충만한 내적 공간을 지니고 계십니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내외적 공간은 허무의 심연이 되겠지만
그러니 이제 하느님의 자녀인 수녀님들,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십시오.
매일의 성무일도와 미사시간,
주님은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 머물 때 또렷해지는 나의 정체성입니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라고 자기의 신원을 분명히 밝히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1,27).”
제가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의 느낌은 ‘어떻게 하면 작고 좁은 외적 공간의 이 땅에서
답은 내적 공간 확보에 의한 내적 자유입니다.
여기 수녀원에서 주변을 돌아보니
그러니 하늘이신 하느님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예 하늘마음, 하느님 마음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 은혜로운 미사시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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