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을 찬미하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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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06-02-19 | 조회수598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2006.2.19 연중 제7주일
이사43,18-19.21-22.24ㄴ-25 2코린1,18-22 마르2,1-12
"주님을 찬미하라"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으로 사는 수도자들입니다.
아니 모든 신자들 역시 할 수 있다면
이 하느님 찬미가 우리 영혼에 기쁨의 날개를 달아줍니다.
오늘 주일 아침 기도 시
그렇습니다.
하느님 향한 우리 믿음, 희망, 사랑의 가장 좋은 표현이 찬미의 기도입니다. 하느님 만드신 세상 모든 피조물들이 마땅히 바쳐야 할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사람들,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더욱 하느님을 닮아 갑니다.
다음의 하느님 찬미 시편 구절은 또 얼마나 감미롭습니까?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 들여라. 복되다, 주님께 몸을 숨기는 사람이여.”
과거를 묻지 않는 하느님이십니다.
이사야서를 통한 주님의 힘찬 선언을 들어보셔요.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말라.
참으로 뉘우칠 때 과거는 불문에 붙이시고 늘 지금 여기서 새롭게 출발 시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내 영혼의 광야에 희망의 길을 내시고, 내 마음의 사막에 사랑의 강을 내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이미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과거를 잊으셨는데
죄를 지을수록 용감해야 합니다.
진정 대죄는 자비로운 은총의 하느님을 까맣게 잊고
죄짓는 게 인간의 일이라면, 용서하는 건 하느님의 일입니다. 자기의 부족과 한계를 잘 아는 겸손한 사람이 회개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죽을 때 까지 아무리 애써도 우리는 죄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초점을 죄에 두면 우리 자신은 한없이 위축되고 초라해집니다.
어떻게 하면 죄를 짓지 않을까 생각하다 보면
끊임없이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삶으로 전환함이 지혜입니다.
또 찬미와 감사의 삶이 우리의 하느님 향한 믿음을, 사랑을, 희망을 북돋웁니다. 이 믿음, 사랑, 희망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없애 주고 마음의 상처도 치유해 줍니다.
이 믿음, 희망, 사랑의 힘에 짓눌려 죄의 경향도, 과거의 나쁜 기억들도 점차 시들어 죽어 버립니다.
성서를 두 말로 요약하면 ‘알렐루야’와 ‘아멘’이라 합니다. 진정 하느님을 믿는 사람 ‘알렐루야의 찬미의 사람’이며 ‘아멘의 긍정적 사람’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임종어 ‘아멘’이었습니다. 참으로 잘 믿는 사람은 ‘예스 맨(Yes man)'입니다.
우리 주님, 두말할 것 없이 끝까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 ‘예스 맨’이었습니다.
“그분께는 늘 ”예!”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아멘!”합니다(2코린1,19ㄴ-20).”
진정 하느님을 믿는 자들, ‘아멘의 사람들’이요 ‘예스맨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온 네 동료들 예스맨들, 믿음의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동료들의 믿음 덕분에 죄를 용서 받아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이를 목격한 사람들, 하느님을 찬양하며 고백합니다.
바로 우리가 배워야 할 점, 이 하느님 찬양의 고백입니다.
알게 모르게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고백 기도보다
그래서 육신의 양식을 매일 세 끼 먹듯이,
그러나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하느님 찬미와 감사 기도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기도의 절정이자 요약이며 우리의 생명의 샘인 성체성사를 통해 오시는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며 영육의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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