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남을 어느 정도까지 용서해야 하느냐고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일흔일곱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성서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일흔일곱 번에다 곱하기 일곱을 한 것이므로, 이는 절대적인 완전수이자 무한대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저는 무한대는커녕 단 하루 아니, 단 한 시간이라는 유한대의 시간 동안에도 진정으로 용서하기가 힘이 듭니다. 오늘날은 어느 분야에서든 전문가를 필요로 하는 전문가 우위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용서의 문제로 고통받을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용서의 전문가를 찾아가야 합니다. 용서의 전문가는 바로 하느님입니다. 서강대에 계신 송봉모 신부님은 "하느님은 용서의 왕이며, 하느님의 나라는 용서의 나라이고, 하느님 나라의 통치방식은 절대적 용서로써 이루어진다" 고 합니다. "용서는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내리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며,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한 뒤에는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 고 합니다. "인간의 힘에만 의존하면 용서한다 하더라도 진정한 용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고 합니다. 저는 결심합니다. 제 삶에 고통을 준 이들의 잘못을 무조건 용서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산다는 것이 가슴에 촛불을 하나 켜는 일이라면 반드시 용서의 촛불을 켜야 한다고, 용서하고 싶은 마음과 용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서로 싸워 만신창이가 될 때는 신께 도움을 청하겠다고 결심합니다. 나약한 인간인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용서의 강을 건너 갈 수가 없습니다. 도움을 청하면 신께서 저의 잘못을 두 배만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몇백 배 더 용서해주시겠습니까. 용서는 어쩌면 신의 고유한 일,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신의 고유한 영역입니다. 신 말고는 아무도 용서하는 일을 못할 것 같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쩌면 진정한 용서가 아닐지 모릅니다. 신의 손길을 거쳐야만 진정한 용서에 이르게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이제 신의 도움으로 신의 나룻배를 타고 미래로 가는 용서의 깊은 강을 건너갑니다. /정호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