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제3주일 "용서하시는 주님을 따름"김정수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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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용승 | 작성일2006-04-28 | 조회수613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부활 3주일 용서하시는 주님을 따름 06. 4. 30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직접 눈으로 보았을까요? 처음에 직접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도들을 예수님 부활의 목격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눈으로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체험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더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지난 주일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 이천년이 지나서 들음으로써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언하기 때문에 우리도 사도들과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도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증명해 보이기 위해 목격한 것을 설명하려고 하니까 오늘 의 우리에게 성경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나오시는 현장을 본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는데 그 체험한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 인간 삶의 모든 평범한 생활의 모습을 다 그려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시니까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어리둥절하고 무서워하고 유령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때 예수님께서는 “내 손과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24, 39)고 하시면서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물고기를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그들이 체험한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와 똑같은 분이심을 밝히기 위해서 의심하는 이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간곡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당신이 죽음도 뛰어넘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살아계실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고 사도들에게 목격한 것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 48). 이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분을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우리 앞에 계시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천년 전에 예수님과 똑같은 모습을 목격했다고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오늘 성경에는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 45)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다른 길이 아니고 옛날부터 알려졌던 성경 말씀을 알아듣도록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통해서 비로소 당신의 부활하심을 깨닫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똑같이 해당될 수 있는 일입니다. 성경 말씀을 깨달았다는 것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듣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또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다는 것은 그 옛날의 역사를 지금에 재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면서 성경 말씀 가운데서 특별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 24, 47)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어떤 모습을 남기고 싶으셨을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체험했을 때 ‘병자를 낫게 하시는 예수님, 빵을 많이 부풀려서 먹게 하신 예수님, 물위를 걸어오신 예수님’ 등 별의별 모습으로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용서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심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오늘 제2독서에 나온 대로 예수님이 세상에서 돌아가신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1요한 2, 2).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유는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이고 용서하신 분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의 체험입니다. 용서는 예수님의 모든 것을 집약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도 우리에게 알려주신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다는 것은 죽음을 뛰어넘고 지금도 예수님이 우리 안에 다시 사신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가 유다인들을 나무라면서 새로운 삶의 길을 밝히는 말씀과 복음이 연결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죽인 예수님은 신분적으로 노예라기보다는 하느님을 철저하게 믿고 순명하신 분이 종의 모습을 지니신 분으로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사도 3, 15)라고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 그분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사도 3, 19)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돌아오다’라는 말의 뜻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온전히 돌아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느님께서 잘못한 인간의 죄를 지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그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사는 것이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남을 용서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는 하늘과 땅이 연결되고 모든 것이 일치와 화해를 이루게 됩니다. 화해와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모든 것이 우리 안에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용서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막히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여러 가지 모습 가운데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깊이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우리 안에 다시 사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주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실천적으로 살고 싶다면 우리는 잘못한 이웃을 용서해야 하겠습니다. 개인뿐 아니라 집안 끼리나 혹은 사회적으로도 더 나아가 국가적으로도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럴 때 이 세상은 교류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정치인들이나 사업가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졌으면 어떻게든 헐뜯고 흠을 잡으며 결코 같이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지금 일본의 행태를 보십시오. 1905년 러일전쟁 중에 점령했던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우기는 일본의 패권주의적 경향에 대해서 4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은 특별 담화 형식으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분명히 선언하였습니다. 회개하지 못하고 침략 당시 점령했던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정부의 태도는 참으로 봐주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 정치인들을 위해서 이 미사 중에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서서 이웃 민족들에게 과거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하고 부당하게 가진 것은 모두 반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나 중국도 일본을 용서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용서를 통한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목격하는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어떤 예수님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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