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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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복순 | 작성일2006-04-29 | 조회수510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 16-21)
배는 무엇인가? 배는 하나의 교통 수단이다. 물건을 실어 나르거나 사람들을 태워 목적지에 건너다 준다. 배를 타고 먼 여행을 하다보면 순항으로 즐거운 여행을 할 때에도 있지만 때로는 예기치 못한 높은 파도를 만나 생명의 위험까지 당할 수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배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여행자이다. 때로는 순탄한 여행을 할 때도 있지만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만나 고생을 할 때도 있고 심하면 생명의 위험까지 당할 때도 있다.
나는 지금 무슨 배에 몸을 싫고 있는가? 내가 타고 있는 배는 안전한가? 무사히 항구에까지 데려다 줄 수 있는 배인가? 순항 중인가? 아니면 높은 파도를 만나 표류하고 있는가? 어떤 이는 재물이라는 배를 타고 있고, 어떤 이는 권력, 명예, 안주, 게으름, 병마와의 싸움, 이기심, 자기 자신이라는 배를 타고 있다. 아무튼 우리가 무슨 배를 타고 있던 내가 타고 있는 배는 세월이 흐른 만큼 나를 어디론가 데려 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안전한 "예수"라는 배를 타지 않고 예수 이외의 다른 배를 타고 있다. 앞에서도 열거하였거니와 "나"라는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환경"이라는 배를 타고 있는 사람도 있으며 "사람"이라는 배를 타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조금만 상황이 바뀌어도 금방 흔들리고 괴로워 한다. 즉 나를 바쳐주고 있는 것이 "하느님"이 아니라, 주위 환경, 자기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이 나를 바쳐주고 있기 때문에 마치 바람을 만난 배가 풍랑에 까뿔리듯이 내 인생이 그것에 의해 좌지 우지 된다.
정말 우리가 "하느님"이라는 배를 타고 있다면, 하느님께 내 몸을 완전히 맡겼다면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마치 어린이가 어미 품에 안겨 평안히 잠을 자듯이 그렇게 편안함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 품에 안겨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은 젖 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 이스라엘아,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주님만 바라고 살아가라."(시편 130,2-3)라는 시편작가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왜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앞에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을 아직도 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어려움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알아보는 제자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의 수준은 아직까지 예수님을 시공간을 초월하시며 어느 곳에나 계시는 하느님으로 알아 보지 못하고 단순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머물고 있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함께 있지 않으면 또 자기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믿음이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은 "조용히 하라"는 말씀 한마디로 바다와 바람까지 잠재우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으로서의 예수님이 아니시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아직 초보단계이다.
그래서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금방 넘어지고 무너지는 미숙한 어린이 수준의 믿음이다. 성숙한 믿음은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요, 초월하는 믿음이다. 즉 주위 환경에 따라 좌지우지 하는 믿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초연하게 바라보고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는 믿음이다.
요한은 빵의 기적을 전해 주고 바로 이어서 오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은 과연 제자들이 빵의 기적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보았는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 보았는가를 시험하기 위함이다.
빵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았다면 절대로 지금 자기들의 눈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일어났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도 멀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믿음은 인간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에서든 현존하시고 모든 어려움을 없애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초보적인 믿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두 번째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그들이 평소에 많이 들었던 낮 익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청각적으로 다가 가신다.
다른 공관 복음에서는 유령인줄 알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두려움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 보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이다.
우리가 이런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주위 상황을 탓할 때도 있고, 또 주위 사람들에게 그 탓을 돌릴 때도 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우리를 어렵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지지 못한데 있다. 우리의 신앙이 아직까지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이 되도록 질적으로 양성되어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늘 나에게 다가 오시는 주님은 어떤 모습인가? 또 오늘 나에게 당신의 모습을 알아 볼 수 있도록 들려 주시는 주님의 소리는 어떤 소리인가? -유광수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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