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아름다운 나라'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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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복순 | 작성일2006-05-12 | 조회수658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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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날씨가 어떻고, 어떤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지 하늘의 구름이 아름답다는 등 매일 매일 창 쪽에 입원한 환자가 안 쪽에 입원한 환자에게 창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재미있게 전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이 두 환자는 매우 친하게 가족처럼 지내면서 지루한 병원 생활을 잘 극복하며 지냈다.
매일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면 창 쪽에 있는 환자는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을 잘 보고서 안 쪽에 입원한 환자에게 이야기 해주는 것이 하나의 낙이었고 안 쪽에 있는 환자는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커다란 낙이었다. 그것이 이들에게는 서로 지루한 병원 생활을 재미있게 지내는 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잘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서서히 안 쪽에 있는 환자가 창 쪽에 입원한 환자를 질투하기 시작하였다.
자기가 그 자리에 있으면 자기가 보고 싶을 때 얼마든지 바깥 세상을 볼 수 있고 일일이 저 사람한테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될텐데 자기는 안 쪽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볼 수 없다고 속으로 투덜거리고 불평하였다.
이런 마음이 들기 시작하니까 예전에는 창 쪽에 있는 사람이 매일 들려 주는 이야기들이 재미있고 감사하기까지 했는데 이제는 하나도 재미가 없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점 점 더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그 사람이 입원해 있는 그 자리에 대한 욕심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안 쪽에 있는 환자는 매일 어떻게 하면 자기가 그 자리에 갈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였다.
안 쪽에 있는 환자가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사이는 점 점 더 좋지 않게 되었다. 안 쪽에 있는 사람이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했지만 말과 행동에서 예전 같지 않게 창 쪽에 있는 사람이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주어도 안쪽 사람은 하나도 재미가 없고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한 미운 감정이 더 커져만 갔다.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그 동안 창 쪽에 있는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매일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기에게 들려 준 고마움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안 쪽에 있는 사람은 위급한 상황에 처해있는 그 사람을 위해서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 쪽 사람은 그 사람이 죽기를 바랬고 죽어가게 놔두었다. 왜냐하면 그래야 자기가 그 사람이 있던 그 자리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바깥 세상을 구경할 수 있게 될 터니까 말이다.
결국 창 쪽에 입원한 사람은 죽었고 안쪽에 있던 사람이 자기가 원했던 대로 그 자리로 옮겨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막상 창 쪽으로 와 보니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옆에 큰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답답했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건물 벽뿐이었다.
평소에 그 사람이 매일 매일 아름답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은 그 사람이 바깥 세상을 보고 이야기 해준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그 사람이 꾸며낸 이야기들이었다.
창 쪽에 입원했던 환자는 안 쪽에 있는 자기가 심심할까봐 자기 나름대로 매일 매일 동화 같은 이야기를 엮어서 아름답고 재미있게 들려 주었던 것이다. 그 사람이 매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겠는가. 그리고 그 사람이 매일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가 얼마나 지루한 병원 생활을 그래도 즐겁게 지낼 수 있었는가를 생각하니까 더 할 수 없이 그 사람이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이 자리가 탐이 나서 그 사람을 질투하고 죽을 위험이 있을 때 오히려 죽기를 바라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했던 자기가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고 어리석은 사람이었는가를 생각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크게 뉘우쳤다.
우리가 알고 본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볼 수 없다. 볼 것이 없으면 보지 못하듯이 아무리 안쪽에 있던 환자가 창쪽의 자리로 옮겨왔어도 그 전에 있었던 사람이 본 것을 보지는 못한다.
자리를 옮긴다고 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눈을 갖고 있어야 보는 것이다. 자리 자체가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있는 눈이 보는 것이다. 창쪽에 있었던 환자가 볼 수 있었던 상상의 나래는 그 사람만이 볼 수 있고 펼칠 수 있는 세계이었다.
그 누구도 그가 갖고 있는 상상의 나라를 대신해서 볼 수 없다. 동화같은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를 그려낼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이야기도 전해 줄 수 없다.
이처럼 아버지의 나라를 볼 수 있도록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 보여 주셨는데 우리가 보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를 볼 수 있도록 가르쳐 주고 길을 닦아 놓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를 볼 수 있는 길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길이 있다. 그 길을 걷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길을 걷더라도 절대로 그 나라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나를 보지 못하는 삶, 아버지를 보지 못하는 삶이 기쁠 수 있겠는가?
-유광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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