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어머님의 마음을 무척이나 상해드리고 기도
에 보답하지 못해서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이곳에 오
기 전날 아버님 묘소를 참배하면서 앞으로는 술을 먹
지 않고 사제로서 열심히 살아갈 것을 약속 드렸습니
다. 부모님에게 약속 드린 내용이 헛되지 않도록 열심
히 치료 받겠습니다.…병원에서 지시하는 대로 열심
히 따르면 분명히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
을 것으로 확신합니다.”(알코올 중독 치료센터에서.
1998년 3월10일, 어머님께 드린 편지 중)
초가집 지붕들 위로 겹쳐져 보이는 십자가는 마을 한가운데로 갈수록 더욱 선명히 드
러났다. 공소건물은 지리적으로 마을의 중심부에 있으면서 정신적으로도 마을 사람
들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주일이면 항상 공소에 모여 예절을 거
행했고,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모여 의논했다. 공소 건물 주위로 옹기공장이 자리
하고 있었다.
난 1952년 구교우 집안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친가로는 7대, 외가로는 6대
가 천주교를 믿었으니 한국교회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집안인 셈이다. 친척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양에 살고 있던 7대조 할아버지와 선조들이 박해로 순교하자 당
시 갓난 아기였던 고조할아버지만이 충북 괴산으로 피신해 살았다고 한다.
이후 우리 선조들은 제천 배론, 강원도 원주, 경기도 장호원 등지에서 생활했으며 마
지막으로 광주군 초월면 산이리에 정착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우리 가문에도 순교자
들이 있다는 말을 하시면서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우리 집은 일꾼을 2명이나 두고 농사를 지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넉넉했다. 모든 집들
이 초가집이었지만 우리 집만 유일하게 기와집이었다. 마을의 제일 큰 어른이셨던 할
아버지는 공소회장으로 활동하셨다. 공소예절을 주도하던 할아버지의 그 카랑카랑
한 목소리는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나를 비롯한 세 형제 모두 사제가 된 것도 이런
신앙심 깊은 가정 환경 덕분일 것이다.
이렇게 안정된 가정 환경 속에서 나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봄에는 새집을 찾
아 들판을 뛰어다녔고 여름에는 냇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가을이면 산에 올라
밤송이에 찔리는 아픔도 잊어가며 밤을 땄고, 겨울에는 썰매를 지쳤다.
그렇게 자연 속에서 뛰놀며 티없이 자란 내가 어떻게 알코올 중독자가 될 수 있었을
까. 일반적으로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원인으로는 유전, 체질, 스트레스, 환경, 문화,
심리적 문제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내가 술을 마시게 된 원인을 굳이 이 중에서
찾으면 유전적인 소인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증조 할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 모두 술을 좋아 하셨다. 작은 아버지도 술로 재산을
탕진 하시고 일찍 돌아가셨다. 어쩌면 나는 선천적, 체질적으로 알코올 중독자가 될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계속)
허근 신부님은..
△1978년 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졸업
△1980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원 연구과 수료
△1980년 사제 수품. 돈암동본당 보좌
△1981년 추기경 비서
△1982년 해군 해병 군종 신부
△1985년 길동본당 주임
△1987년 서울대교구 교육국 주일학교 지도
△1989년~1998년 상계동, 면목동, 난곡동본당 주임
△1998년 알코올 중독 전문 병원에서 치료
△2000년 미국 버나딘대학교 심리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대교구 가톨릭 알코올 사목상담소 소장
저서 :「하느님으로부터 당신에게 사랑을」
「그때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개풀뜯는 소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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