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96) 지리산의 추억 / 전 원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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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정자 | 작성일2006-06-09 | 조회수724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말씀지기 주간 : 전 원 신부님의 글>
신록이 짙푸르게 익어가는 6월이면 늘 그리워지는 산이 있습니다. 땅의 거인이 봄의 나른한 기운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듯, 초여름이면 더욱더 웅장하게 그 힘과 위용을 드러내는 산입니다. 일찍이 남명 조식 선생이 "하늘이 울어도 아니 우는 뫼" 라고 그 장엄함을 찬탄했듯, 해발 1,915m 천왕봉을 위시하여 100 여 개 이상의 준봉들이 구름 위로 솟아 올라 하늘을 받치고 있는 산입니다.
굳이 여름이 아니라 해도 지리산 산정에 오르면 산의 장엄함과 비경에 빠져 경이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계절의 변화뿐만 아니라 수시로 바뀌는 날씨 덕분에 지리산은 마치 거대한 생명체가 꿈틀대듯 하루에도 몇 번씩 멋진 광경을 연출하곤 합니다. 다도해의 운무가 몰려들어 산봉우리들이 둥실 구름바다 위로 떠올라 천상(天上)의 산이 되는가 하면, 이내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산안개에 휩싸여 산은 온통 녹아드는듯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때론 후두둑 내리는 비가 산정을 적시다가 어느덧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되어 장엄한 지리산의 자태를 땅에 드러냅니다.
특히 산정에서 바라본 해질녘의 지리산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한낮에 작열하던 태양이 온 산을 넘어 이제 마지막 진홍빛을 뿜으며 사라질 때는, 삼라만상이 신비경에 빠져들 듯 깊은 침묵과 평화에 젖어듭니다. 더욱이 어스름 밤이 내리고 어둠에 깃든 풍경들이 하나둘 담묵색으로 물들어가면, 지리산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깊고 거대한 하나의 전설이 됩니다. 별빛에 둘러싸인 지리산의 밤풍경은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옛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지리산에 대한 기억은 이런 경이로운 산정의 풍경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저에게 지리산의 추억은 어릴 적 사제성소의 꿈을 다시 일으켜 주신 어느 신부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신학교 입학을 준비하면서 저를 추천해 주신 그 신부님의 사제관에서 공부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릴 적부터 품어 온 사제의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사제와 생활을 함께하면서 여지없이 무너져 갔습니다.
'만인의 아버지'라는 신부(神父)의 화려한 수식어 뒤에는 마치 연극이 끝나고 관객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의 텅 빈 무대처럼 빈 성당에 홀로 남아 있는 사제의 삶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번잡한 사회생활에 익숙해진 저에게는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고독한 세계로 보였습니다.
숱한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도, 죄스럽고 약한 자신이 하느님의 사제로 산다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슬금슬금 그 자리를 빠져나갈 구실을 찾고 있었습니다.
지리산을 처음 오른 것은 바로 이렇게 나의 성소가 흔들릴 때였습니다. 신부님을 따라나선 길은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100리길 힘겨운 종주산행이었습니다. 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느껴볼 겨를도 없이 힘겨운 산행을 게속하면서, 저는 제 자신의 삶에 대하여 묻기를 계속하였습니다.
지리산의 종주길은 마치 한 인생의 축약본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을 걷다 돌아보면 굽이굽이 걸어온 길이 아스라이 보입니다. 참 많이도 험한 산을 넘어 왔구나 싶어 다시 앞을 보면, 넘어야 할 봉우리들이 까마득히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목적한 산행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오직 앞으로 가는 외길만이 놓여 있었습니다. 열병처럼 앓아왔던 어릴 적 꿈이 이런 길을 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내가 가야만 할 길이었습니다.
'그래, 가는 거다!'
지리산의 기운 같은 힘찬 외침이 내면으로부터 울려온 것은 이렇게 지리산의 동서를 잇는 종주산행길이었습니다.
지리산과의 이런 첫 인연은 신학생 시절뿐 아니라 사제 생활을 하면서도 수없이 지리산 종주길을 찾게 했습니다. 지금은 무릎관절이 약해져서 추억 속의 지리산이 되어 버렸지만, 지금껏 지리산은 숱하게 저에게 용기를 주었고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오르막과 내리막을 거듭하며 운명처럼 자기의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평지가 있는가 하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올라야 할 언덕이 있습니다. 벼랑 위를 걸어가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산정에 올라 눈몰겹게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쉼의 시간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우리네 삶도 이렇게 생각하면 참 편해집니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산행을 하듯 '이것이 사는 것이다'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면 삶에서 오는 어려움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사실 지리산 종주길을 걸어보면, 등산의 목적이 어떤 특정한 산봉우리를 오르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산길을 오르내리는 걸음걸이가 어느 순간 산행의 목적이자 의미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소위 세상에서 출세했다는 자리에 오르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한 발 한 발 성실하게 살아내는 순간순간이 삶의 참된 의미이고 목적입니다.
산꼭대기에 올랐다고 인생에 성공한 자가 아니고 계곡길을 걷는다고 인생의 실패자가 아닙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 때론 엎어지고 넘어지면서도 나에게 주어진 길을 꿋꿋이 가는 이가 참으로 성공한 자입니다.
어쩌면 지리산의 참된 아름다움은 이렇게 멋진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반대로 우리들의 멋진 삶의 이야기가 지리산의 신비롭고 경이로운 아름다움으로 피어났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제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지리산의 추억은, 적어도 사람들은 저마다 지리산만큼이나 장엄하고 아름다운 삶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지기: 2006/6 : 편집자 레터: '지리산의 추억' 전문(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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