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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복음묵상]요나보다 더 크고,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사람 / 박상대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24 조회수871 추천수3 반대(0) 신고

   2006년 7월 24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심판날이 오면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설교만 듣고도 회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마태 12,41)

At the judgment,
the men of Nineveh will arise with this generation
and condemn it,
because they repented at the preaching of Jonah;
and there is something greater than Jonah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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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 사흘 밤낮 땅속에 있게 될 당신의 죽음을 하나의 표징으로 예고하십니다

 

☆☆☆

 

 우리는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어떤 기적을 일으켜 주시길 청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인받고 싶은 까닭입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까닭입니다. 어떤 일본 신자가 “하느님, 저에게는 기적을 보이시지 마십시오. 저는 이미 충분히 주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신앙입니까? 우리가 세심하게 관찰하면 우리는 날마다 기적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수많은 질병과 악들 가운데 오늘 하루를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울 때가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사실 자체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의학적 지식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수억 대 일의 경쟁을 거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은 우리 가까이에서 늘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 요나보다 더 크고,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사람

   오늘복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전에 ‘닐 기유메트’ 신부님께서 쓰신 ≪나와 함께 낙원

에≫라는 책에 들어있는 “기적병”이라는 이야기를 먼저 들려 드릴까 한다. 거기에 등장하

는 주인공 메나헴은 항상 기적에 굶주려 있었다. 그가 어느 날부터 광야에 살면서 자기에

게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설교를 하여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위대한

고행자 요한 세례자를 따라다닌 이유는 놀라운 기적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요한 세

례자가 설교와 세례를 베푸는 것 외에 다른 기적을 일으키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

해지자, 메나헴은 그를 떠나 당시 한참 인기가 높아져 가고 있던 나자렛 출신인 예수의

문하로 들어갔다. 

   예수의 추종자가 된 메나헴의 첫 주간은 황홀함 그 자체였다.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일

련의 기적들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병환자가 단번에 깨끗하여지고, 중

풍병자가 일어나 누워있던 요를 걷어 통째로 매고 가며, 절름발이가 걷게 되고, 반벙어리

가 다시 말을 하고 들으며, 수천의 군중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가 터질 만큼

먹고, 악령 들린 사람들이 말짱해지는 그런 기적을 자기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했고 예수께 박수를 보냈다. 메나헴도 신이 나서 우쭐거리고 있

었다. 

   그 다음 주간에 예수는 더 놀랄 기적들을 보여주었다. 배를 삼키려드는 거센 풍랑을 호

통 쳐 가라앉히는가 하면, 보이지도 않는 데서 병자를 원격치유하고, 급기야 죽은 사람까

지 살려내는 것이었다. 메나헴의 하루하루는 너무 행복했다. 기적들 가운데 간간히 섞여

들려오는 예수의 가르침에는 아랑곳없이 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기적들이 한편의 영화

가 되어 상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메나헴은 예수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예루살렘에

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대거 몰려와 예수께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 자신을 증명하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그 때 메나헴은 이제야 기적의 최고절정을 보

게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의 청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하고는 기

껏 한다는 소리가 ‘구약성서의 예언자 요나의 기적밖에 달리 보여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

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제는 예수의 기적이 그의 눈

에 시시하게 여겨졌고, 더 이상 재미가 없었던 것이다.

   보따리를 싸들고 더욱 더 짜릿하고 스펙터클한 기적을 찾아 떠나가는 메나헴을 우연히

만난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라훔이었다. 라훔은 메나헴이 왜 예수를 떠나는지를 알고 있

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세상의 어떤 기적도 당신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일세. 중요

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자네의 마음일세. 자네 마음을 한번 변화시켜보게나!”하고 말이

다. 라훔은 메나헴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어떤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안타까워

하며 그를 보내고 말았다. 

   우리는 지난 주간 금요일과 토요일 복음을 통하여 마태오복음사가가 예수님께서 구약

으로부터 이스라엘에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강조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비단 마태오뿐 아니라 다른 복음사가들도 예수님의 “메시아-신학”을 단번에 보도

하지 않고 복음전체를 통하여 점층적인 방법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메시아성은 세 가지 측면에서 주의 깊게 고찰되어야 한다.

   ① 첫째는 예수님 스스로의 메시아에 대한 자의식(自意識)이다. 하느님 편에서 볼 때

말씀이신 성자는 육화(肉化) 사건으로 말미암아 즉시 이 세상의 메시아로 계시된다. 그러

나 인간적인 측면에서의 메시아성은 인간 예수의 자의식 속에서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성

숙, 즉 ‘되어 가는 것’이다.

   ② 둘째는 복음사가들의 편집사적 노력이다. 예수님을 더 이상 물리적으로 체험할 수

없는 신약성서 시대에 예수의 목격자인 사도들과 그들의 증언을 기록한 복음서는 예수님

을 간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복음사가들은 저마다

고유한 편집의도를 가지고 “메시아-신학”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구상은 대략

“나자렛 출신 예수 -> 선생, 랍비 -> 위대한 선생 -> 예언자 -> 대예언자 -> 메시아 ->

그리스도” 라는 도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결국 복음서의 목적은 예수를 메시아요 그리스

도로 피력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말이다.

   ③ 셋째는 예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다. 이는 예수님이 진정 메시아인지에 대한 인

간의 수용여부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내심 가득 찬 메시아적 자의식으로 군중을 가

르치고 그들에게 메시아적인 업적을 보이며, 또 복음사가들이 위에서 말한 편집의도를

가지고 청자(聽者)와 독자(讀者)들을 유인한다 하더라도 마지막 결정은 인간 스스로가

내린다. 이 결정에는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그들 고유의 메시아 관(觀), 또

는 메시아 상(象)도 함께 작용한다. 그래서 복음서는 예수께 대한 인간의 다양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태도는 마지막에 가서 수용(accept)과 거부(reject), 나아가 신앙

(belief)과 불신(unbelief)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 세 가지 측면을 함께 고려한다면 오늘 복음은 쉽게 이해된다. 사람들이 예수께 ‘자

신을 메시아로 증명할 수 있는 기적’을 요구한 것은 예수를 메시아로 수용(受容)하고 신

앙(信仰)하기 이전에 그에 합당한 자료를 요구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는 이미 구약성서 시절에 있었던 요나의 기적(요나 3장)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요나의 기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요나의 설교를 듣고 죄악에 빠져있던 니느웨 사람들

모두가 회개하였다는 것이다. 즉 기적이 아니라 오직 설교만으로 삶의 태도를 바꾸고 자

신들을 내적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외적인 기적은 결코 믿음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진정한 기적은 바로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누구도 종용할 수 없는 나 자신 스

 스로의 변화 말이다. 그럴 때 우리는 전정 예수님을 주님이요 메시아로 믿고 고백할 수

있으며, 이 믿음이 가져오는 엄청난 신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R)

http://my.catholic.or.kr/vegab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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