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27 조회수845 추천수6 반대(0) 신고
2006년 7월 27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blessed are your eyes, because they see,
and your ears, because they hear.
Amen, I say to you, many prophets and righteous people
longed to see what you see but did not see it,
and to hear what you hear but did not hear it.”

(Mt 13.16,17)

 

 

제1독서 예레미야 2,1-3.7-8.12-13

 

복음 마태오 13,10-17

 

제가 대학원 1학년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본당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이에요.

“이제 너도 대학원생이 되었으니, 이번 돌아오는 주일에 신자들 앞에서 강론을 해보렴.”

“강론이라뇨. 저는 이제 대학원 1학년일 뿐인데요?”

“그러니까 해보라니까. 아마 좋은 경험이 될 거다.”

한 주일 내내 걱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동안 성당을 계속 다니면서 그렇게 많은 강론을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강론을 해야 하는 입장에 서니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를 도대체 모르겠더군요. 머릿속에서는 아무 것도 떠올려지지 않고, 시간만 계속 흘러갈 뿐이었지요. 이제 더 이상 미룰 시간이 없었던 저는 급한 마음에 성서를 설명하는 주석서만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좋은 내용이라는 것들만을 정리했지요.

드디어 첫 번째 강론을 하는 날, 너무나 긴장을 해서 어떻게 강론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마 이렇게 시작했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한 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연중 제16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뻔 한 구조, 그리고 신자들의 관심을 딱 끊어버리기 좋은 구조로 말을 하고 있었지요. 아무튼 첫 번째 강론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 스타일이 바로 저의 강론 스타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부가 되어서도 이 모습은 변하지 않았지요. 복음 해설 중심의 강론. 그리고 딱딱한 강론, 원고에서 절대로 눈을 떼지 않는 모습. 그런데 저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마 전에 새벽 묵상 글에서 한번 썼던 것 같은데요.

글쎄, 제가 강론을 마치고 “잠시 묵상하겠습니다.”하고 뒤를 도는 순간, 어떤 형제님께서 갑자기 손을 드시고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께서 무슨 말씀하시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설명해주십시오.”

그때서야 제 강론의 문제점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어렵고 딱딱한 강론, 그래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강론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천 년 전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제가 주석서를 보면서 강론을 했던 것처럼, 율법 해설서를 보면서 사람들에게 딱딱하게 말씀하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와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알아듣기 쉬운 비유말씀을 통해서 접근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욱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하시려고 쉬운 비유 말씀을 하셨던 것이었지요.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또 어렵지도 않습니다. 일상의 비유를 통해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이야기를 해야 자신이 더욱 더 똑똑하게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사람들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더욱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지요. 또 모르지요. 자신들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복잡하게 만들어서 아무도 못 들어가게 만들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저 역시 이런 모습을 취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더 많이 배웠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어렵게 이야기하고,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것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이렇게 깊은 묵상을 했다고 자랑하고 있더라는 것이지요.

저의 교만이고,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 신비는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닌데…….

지금도 종종 이런 착각과 교만 속에 빠져들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 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의 첫째 서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1요한 2,6)

주님께서 보여주신 가장 낮은 자세의 겸손한 모습. 그 모습만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할 모습이었습니다.


 

어렵게 말하지 맙시다.


 

 
시련에 감사하는 마음(박성철, '누구나 한번쯤은 잊지 못할 사랑을 한다' 중에서)


 

두 사람에게 똑같은 씨앗이 한 톨씩 주어졌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 그 씨앗을 심었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정원에서 가장 토양이 좋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다른 한 사람은 거친 토양의 산에 그 씨앗을 심었습니다.

자신의 정원에 씨앗을 심은 사람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올 때면 나무가 흔들리지 않게 담장에 묶어두고, 비가 많이 오면 그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위에 천막을 쳐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산에 그 씨앗을 심은 사람은 아무리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도 나무가 그것을 피할 수 있게 해주지 않았습니다.

단지 한 번씩 산에 올라갈 때면 그 나무를 쓰다듬어주며 『잘 자라다오. 나무야』라고 속삭여 자신이 그 나무를 늘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만 일깨워 주었습니다.

20년이 지난 후…….

정원에 있는 나무는 꽃을 피우기는 했지만 지극히 작고 병약했고, 산에서 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들 중에서 가장 크고 푸른 빛을 띤 튼튼한 나무로 자라나 있었습니다.

시련과 혼란, 아픔과 갈등 없이 좋은 성과를 바라지 마십시오.

산에서 자란 나무는 비바람과 폭풍우라는 시련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이한 대가로 그렇게 웅장한 모습으로 산을 빛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픔과 실패 없이 거둔 성공은 손 안에 쥔 모래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지금 그대에게 주어진 모든 시련에 감사하십시오.

그것이야말로 그대가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행복의 씨앗입니다.

 

the one who says he abides in Him ought himself

to walk in the same manner as He walked

(John 2.6)

 


 T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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