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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22)/ 고통중에 있을 때, 위험한 태도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29 조회수762 추천수13 반대(0) 신고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22)

 

 "고통중에 있을 때, 참으로 위험한 태도는 더 이상 하느님을 믿지 않거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는 태도가 아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이 잔인한 분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다."

 

이 루이스의 체험과 비슷한 세계를... 우리 모두 알고 있는 분 같아요. 우리 천주교 소설가로서 박완서씨가 역시 체험했었습니다. 박완서씨가 남편을 사별한지 1년이 채 안 됐을 때,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게 됩니다.

 

이 외아들은 마취과 전문의로서 레지던트 과정중에 있었구요. 26살밖에 안 됐던 그야말로 미래가 창창했던 외아들입니다. 남편이 돌아가신지 1년이 채 안 돼서 이렇게 또 외아들을 잃었을 때, 이 분께서는 거의 미쳐버립니다.

 

그래서 십자가만 바라다 보면 너무나 화가나서 그 십자가 고상을 수십 번 땅바닥에 내 팽개쳤습니다. 그리고 자기 외아들을 데리고 간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하느님에 대해서 많은 원망을 했었습니다. 직접 그분이 썼던 그 원망의 글을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온종일 하느님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 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닜는 신.

  내 증오의 마지막 극치가 남아 있는 살의.

  나의 살의를 위해서라도 하느님은 있어야만 한다."

 

어떻게 보면 "어떻게 신자가 이런 얘기들을 할 수 있을까?" 여러분들이 상당히 의아해 할거예요.

 

박완서씨가 이렇게 하느님에 대해서 자신의 마지막 살의까지 나타내면서 하느님을 원망하고 싶어 했던 것은 사실은 하느님이 철저히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강한 부정은 사실은 가장 강한 긍정을 전제했던 것이지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향해서 울부짖었던 것이지요. 박완서씨가 먼 훗날, 외아들을 잃은 상처가 치유는 되지 않았지만 어느정도 아물게 되었을 때,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 때, 나에게 포악을 부리고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그 분조차 안 계셨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살기는 살았겠지요. '인간의 목숨은 참으로 모지니까요.' 살기는 살았겠지요. 하지만 지금처럼 살아 있을 까요? 지금보다 훨씬 비참하고 불쌍하게 살고 있으리라는 것은 눈에 환히 보입니다."

 

바로 그 하느님께 원망하면서 그래도 하느님을 놓치지 않고 하느님을 움켜쥐었기 때문에 이렇게 뒤늦게 "그래도 하느님이 있어서 이 모양으로 지금 살고 있다." 는 고백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성경의 인물들처럼 죽기를 청한다 할지라도 결코 하느님을 떠나거나 자살을 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를 몇 번을 내 팽개쳐도 좋고 우리 수사님처럼 "개XX," 라고 욕을 해도 좋지만 하느님을 떠나거나 자살을 해서는 안 될 겁니다.

 

어떤 삿대질도 좋고 원망도 좋지만 항상 하느님 앞에 머물러 있는 것이, 고통이 나중에 구원적으로 변하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통도 나중에 구원적으로 바뀝니다. 결국 그 고통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체험은 구원적인 체험이며 신학적인 체험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제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좀 많았고,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실 수도 생활을 하게 된 동기중에 하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많은 분들을 죽음으로 잃었기 때문에 그랬지요...

 

 

                          <송봉모 신부님의 영성강좌 테잎>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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