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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눈물 한방울을 찾아 1. . . . . . . [정채봉님]
작성자김혜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6-08-08 조회수693 추천수7 반대(0) 신고

 

 

 

 

 

언제부터 나한테 ‘아버지’ 생각이 심어졌을까?

그 문제를 생각하면 나는 아득해진다.


아마도 국민(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아버지, 어머니’ 라는 단어를

익히게 될 적부터 그러지 않았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물안개가 끼인 호수 저편의 풍경처럼 아물거리는..

유년 시절의 삽화가 두어 컷 있기는 하다.


하나는 정강이에 털이 하도 많아서 내가 얼레빗으로 빗었던 기억이고,   또 하나는 캄캄한 솔숲 길을 업혀가던 기억이다.

그러나 그 기억은 아버지가 아니고 할아버지나 삼촌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아버지’라는 낱말을 익히고  

돌아와 보니 나한테는 아버지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할아버지께 여쭈었다.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일본에 있다.”

“일본은 어디에 있는 땅이에요?”

“저기 수평선 넘어 있다.”

“왜 일본에 갔어요?”

“돈 벌러 갔다.”


그날 뒤로 나는 백지가 있으면 수평선에 기선 한 척이 떠오는 것을   

 자주 그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영 우리 앞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어쩌다가 편지가 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나를 무릎 꿇려 앉히고는 아버지의 편지를 큰소리로 읽어 주셨다.


나는 편지 첫줄에 나오는 “채봉아”에 늘 큰 소리로 “예!” 하고

대답하면서 속으로

“내 대답 소리 들려요?” 하고 묻는 것이 재미있어서 혼자 킬킬거리다가   할아버지한테 호통을 듣곤 했다.


그다음에 나는 아버지한테 보낼 편지를 할아버지가 불러 주시는 대로

 썼는데 맨 마지막에는 한결같이

“아버지가 보고 싶으니 하루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와 주십시오.” 하고 적었다.


그 말은 말할 것도 없이 할아버지의 속마음이고

나는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다.

만일 내가 마음 속 그대로를 썼다면

“저는 이 편지를 받는 분이 어떻게 생기셨을까 굉장히 궁금합니다.”

라고 군인에게 위문편지를 쓰듯이 했을 것이다.


나는 차차 커가면서 아버지에 대해서 조금씩이나마 귀동냥으로

알게 되었다.


그이(아버지)는 딸만 내리 셋을 낳다가 본 우리 집안의 응석받이였고,   어렸을 적에 잔병이 유난히도 많았고,

큰누나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학교를 다니다가 삼대독자이신

할아버지의 간절한 열망에 따라 스무 살에 일본에서 불려나와

장가를 들었다.


그때부터 오 년동안 할아버지의 어류 도매업을 거들었고,

장사요령이 모자란다고 할아버지로부터 단련을 받으면서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보셨다.

그러니까 아버지 스물두 살에 낳은 아들이 나였다.

내가 세 살이 되었을 때에 누이가 막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병사하셨다.


그때를 기다렸듯이 아버지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셨고,

그곳에서 일본인 아내를 맞아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한테 아버지를 ‘엄부’로 인식시키시려고 노력하시던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때부터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나는 마치 방풍림 없는,

노천에 내버려진 작물처럼 되어 버렸다.


내가 아버지께 적개심을 갖게 된 것은 그때부터이다.

아버지에 대해 남들이 물으면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낳아만 주면 자식이냐, 키워 주지도 않는데 아버지냐” 는 반항적인

인식이 내가 장가를 들어 아이를 얻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니, 그 무렵에 아버지의 부음을 듣게 되었으므로 살아생전의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그런 관념의 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동무를 따라서 그 아버지의 묘소에 들르게 되었다.

잘 가꾸어진 그 무덤은 그때까지 어머니 무덤에 무심했던 나에게

일깨움을 주었다.


“그래, 나한테도 어머니의 산소가 있지 않은가..

 우리 어머니 무덤의 풀은 누가 베고 있는가.”


나는 친구네 집에서 낫을 빌려 갈아들고 삼십 리 밖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 나섰다.

아이들이 소를 매어 놓고 놀고 있는 산자락에 이른 나는 황량한

바람을 느꼈다.


온통 벌겋게 무너져 내린 묘 봉우리와 엉켜 있는 찔레 덩굴을

보았다.

나는 찔레 덩굴을 치면서..

붉은 흙을 만지면서..

“아버지 당신, 두고 보자!”고 되뇌었다.


이제 생각하면 어머니의 무덤이 그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탓만이

아니었는데도 그 무렵의 나는 우리 집안이 안 된 탓을 모두

아버지한테로 돌리고 있었다.


나는 그날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뿌리며

언젠가는 꼭 아버지를 여기로 모시고 와서 무릎을 꿇리고

사죄케 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러다가 나는 우연히 할머니의 반짇고리 속에서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다.

아주 잘 차려입은,

너무도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한 가족 사진이었다.


아마도 유원지에라도 간 듯했다.

아이들 둘도 웃고 있었고,

아이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웃고 있었다.

옷차림도 남부러울 게 없었고,

마냥 즐거워 보이는 가족이었다.

그때에 가슴에 일던 격랑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뒤로 나는 아버지한테 보내던 ‘학비 타령’의 편지를 끊었다.


나는 야생이고..

사진 속의 두 아이들은 울안에서 고이 자라는 자식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로 아버지는 내 나이 네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내가

군에 복무하던 스물두 살 때까지 한 번도 상면하지 못했다.

철저한 ‘버림’이었던 셈이다.

 

< 위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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