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마태오 복음 23장 13-22절
사제로서 연륜이 쌓여가면서
바뀌게 되는 점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소위
‘참신한 강론’의 부담감으로부터
해방된 일입니다.
‘마땅하고 옳은’ 말만 골라서
하는 틀에 박힌 강론을 피하려다 보니,
준비하기 위해 책도 많이 읽고
묵상도 많이 했습니다.
어느 날 피정 차 떠나 있다가
모 주교좌 성당에서
부활성야미사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주교님은 지극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강론을 하셨습니다.
빛의 예식의 의미부터 시작해서,
신자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차근차근 설명하셨습니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고루한 면들은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사실 그 주교님의 강론은
그날의 전례가 의도하는 바를
가장 충실히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내가 해온 강론이
참신함의 유혹에 빠져
얼마나 주변적인 것들만 다루었는지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이란
이미 2천 년 전의 것인데,
그 속에서 뭐 그리 참신함이 나오겠습니까.
우리의 인간성이 원래 낡은 것이다보니
그것을 극복하게 만드는 능력이
새롭고 참신한 것이지,
전혀 안 들어본 얘기를 가져다 하는 것이
참신함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전해 받은’(1코린 15,3) 신앙을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신앙’을 전해주어야
예수님께서 비난하신
‘불행한 인도자들’이 빠지는 위험을
벗어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김광태신부님
소금항아리에서 펌
첫마음 - 정채봉 -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이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는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가 새로우며,깊어지며, 넓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