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미사 책의 오늘의 전례 소개 내용을 읽다가,
우리나라 교회도
초기부터 얼마나 모진 박해를 받았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
1801년 신유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86년 병인박해 등
근 백 년 동안 일 만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합니다.
제가 로마에서 수도자들 모임 시,
어느 수녀님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었을 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일 만 여명의 순교!
얼마나 끔찍스럽고 처절했겠는 지요?
순교자들의 신앙위에 세워진 한국 교회입니다.
현세적 물질주의가 팽배한 세상,
그 어느 때보다도 순교 영성이,
순교적 믿음이 절실한 때입니다.
순교 역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충만한 삶을 삽니다.
이런 이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어 어떤 고통도 겪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이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겠지만
이들은 평화를 누리며, 불멸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니 정작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을 그대로 우리의 고백으로 삼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이나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읽을 때 마다 감동적이라 강론 때는 늘 인용하게 됩니다.
이런 사랑 있어 가능한 순교요, 순교적 삶입니다.
죽어서만이 순교가 아니라,
살아서도 순교적 삶을 사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고통으로 점철 된 삶 중에도 주님을 희망으로 삼아,
제 십자가를 지고 백절불굴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의 용사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숨을 내놓는 비상한 순교가 아니라 매일이 순교적 삶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바로 이 말씀이 순교적 삶에 대한 정의입니다.
핵심은 날마다에 있습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내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욕심 절제로 세속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내 책임을 다하면서
주어지는 고통이나 어려움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게 바로 순교적 삶입니다.
분도 성인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
이 또한 순교적 삶에 대한 암시로 초점은 역시 ‘날마다’에 있습니다.
분도 규칙서 머리말이 마지막 구절도 생각납니다.
“주의 가르침에서 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그분의 교훈을 항구히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
이 또한 우리의 수도생활이 순교적 삶임을 드러내주는 구절입니다.
거듭 말씀들이거니와
이 모든 순교적 삶을 가능케 해주는 원동력은 그리스도와의 사랑입니다.
이 주님과의 깊어가는 사랑이
자발적으로 기쁘게 순교적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라 했습니다.
주님 때문에
날마다 나를 버려갈 때 익어가는 참 나의 열매입니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당당히
주님을 증언하는 삶, 역시 순교적 삶입니다.
날마다 순교적 삶에 충실하도록
당신 말씀과 성체성혈로 우리의 영육을 충전시켜 주시는
참 좋으신 주님이십니다.
“행복하여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