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동생은 초등학교 5학년인 딸 하나를 키우며 살고 있다. 혼자서 생업·집안일·자녀양육을 책임지고 산다. 일인 삼역의 삶을 살지만 어느 하나 만만한 역할이 없다. 특히 자녀를 양육하는 일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사실 동생은 조카와 적잖은 말씨름을 하며 산다. 삶이란 ‘지지고 볶는 것’인 양. 또 요즘 아이들이 여간 영악하지 않는가?
그런데 얼마 전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혼자 아이를 키우니 답답하고 힘들 때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어린 딸의 돌발적인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를 때도 있다. 이럴 때 누군가에게 정서적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조카는 얼마 전 학교에 가지 않고 친구와 둘이서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동생은 학교 선생님이 전화를 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생이 직장일을 마치고 집에 와 보니 아이가 슬슬 눈치를 보더란다. 동생은 득달같이 달려가 매질을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아이에게 조용히 상황을 물어보았다. 상황 설명을 듣고 난 동생은 아이에게 물었다. “마음이 어땠니?”, “응, 학교 안 가면 재미있을 것 같았는데 너무 지루했어. 그리고 엄마한테 야단맞을 것을 생각하니 너무 불안했어.” 동생은 야단치려던 생각을 접었다. “다음에 또 그럴 거야?”, “아니.”
조카는 다음날 아침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등교했다. 자신이 잘못했고 엄마가 야단치지 않아 고마웠다고 하면서 ‘엄마, 사랑해’ 라고 덧붙였단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이런 애증관계를 통해서 더 깊어질 것 같다.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 깊어지는 것이 아닐까?
김정대 신부(예수회·인천 `삶이 보이는 창` 운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