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12) 한 잎 낙엽에 부쳐 / 전 원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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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정자 | 작성일2006-10-24 | 조회수1,022 | 추천수11 | 반대(0) 신고 |
글쓴이 : 전 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말씀지기 주간
며칠 전 성경을 뒤적이다가 낙엽 하나가 책갈피에서 팔랑이며 떨어져 나왔습니다. 나뭇잎을 책갈피에 꽂아둘 만큼 저에게 소녀같은 감수성이 있는 것도 아닌데, 벌레 먹고 바람에 찢긴 낙엽 하나를 두툼한 영어 성경 속에 오랫동안 묻어두고 있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2년 전 사제 생활 10년차에 접어들면서, 캐나다 겔프(Guelph)라는 작은 마을, 아름다운 피정의 집에서 10월 초순부터 11월 중순에 걸쳐 40일간의 긴 피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캐나다의 광활한 대지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피정집에서 저는 하루하루 깊어지는 계절을 지켜보며 대침묵 피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지 저편 지평선을 넘어가는 석양을 보기 위해 저녁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초원을 거닐며 산책을 했습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푸르른 빛을 잃어가는 초원의 저녁 풍경하며 하루하루 붉은 빛을 더해가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것으로 마치 하루의 숙제를 끝내듯 낮 시간을 마무리했습니다.
지구의 반대편 외딴 피정집에서 만난 이런 대자연의 풍경은, 마치 불치의 병으로 생의 마지막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평소에 별로 생각하지 않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끊임없이 묻게 했습니다.
인간 존재면 누구나 예외없이 최종적으로 직면해야 할 문제는 죽음입니다. 불행하게도 인간의 미래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찬란한 행복이 아니라, 늙고 병들어 결국은 죽어야 하는 운명입니다.
세상에서 온통 잘난 듯 화려하게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던 사람들도 한낱 병들고 쇠약해진 몸이 되어 어둡고 침침한 죽음의 길을 홀로 쓸쓸히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외면하고 거부해도 죽음은 우리 삶의 최종 목적지가 되어 있습니다.
피정을 하는 동안, 삶의 의미에 대한 묵상은 결국 죽음에 대한 물음으로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저는 피정 내내 가슴에 통증까지 겹치면서 죽음과 몸서리치는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신앙에 투신한 사제는 죽음을 초연하게 맞이하리라 사람들은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저에게만은 죽음은 늘 두렵고 외면하고픈 얼굴입니다.
육신의 고통과 숨 막힘에 몸부림치는 죽음의 순간을 관상하면서, 저는 피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허무를 실감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삶의 업적이라 여겨지던 온갖 것들과 살아온 흔적들이 무의미한 환상으로 일거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오로지 자신의 지독한 독선과 이기심만이 부끄럽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런 부끄러운 얼굴을 하고 가기에는 죽음의 길은 너무나 낯설고 숨 막히는 길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시간의 저편 미지의 세계를 향한 죽음의 길목에서 애타게 주님을 부르며 용서와 자비를 청하는 가련한 자신을 보았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지 주님밖에 없다는 것, 주님을 놓치면 그 무엇으로도 이런 낯설고 어두운 죽음의 길을 갈 수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신앙 고백을 저는 되뇌고 있었습니다.
11월이 되자 나뭇잎이 붉게 물들다 못해 바람결에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나무를 바라보며 저는 이런 질문을 계속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왜 이렇게 이 땅에 끊임없이 인간 생명을 뿌려놓고 거두어들이기를 계속하시는지,
계절의 변화처럼 젊음의 기쁨도 잠시뿐으로 곧장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인간 존재의 처절한 삶의 고통을 하느님은 아시는지,
역사 속에서 인간 생명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끊임없는 윤회는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이 역사 속에 한 점, 한 순간으로 왔다가 가는 나의 존재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면 역사란 수백 수천만 년의 수명을 가진 거대한 나무 같습니다. 시대의 풍상을 겪으며, 때론 썩고 잘려나간 상처를 안은 채로 끊임없이 푸르른 잎을 틔우고 다시 떨구는 생명작용을 계속하는 생명체 말입니다.
어쩌면 인간 생명은 역사라는 거대한 나무줄기에 붙어 있는 작은 나뭇잎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뭇잎이 여름의 태양빛을 받아 영양분을 만들어 나무줄기에 전달하고 가을이면 낙엽으로 떨어지듯, 내 존재는 역사라는 거대한 나무줄기에 자신이 가진 아주 작은 그 무엇인가를 넘겨주고 사라지는 한 잎 낙엽과 같은 존재입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온통 우주를 담을 만큼 위대하고 소중한 존재이지만, 한편으로는 역사 안의 한 점, 잠시 팔랑이다 떨어지는 낙엽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계절의 윤회처럼 숱하게 인간생명이 나고 또 사라지는 가운데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라는 아름다운 나무를 키우고 계십니다.
피정이 끝날 무렵에는 군데군데 서 있던 나무가 어느새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매일 걷던 산책길이 낙엽이 내려 울긋불긋 더욱더 아름다웠습니다. 걸음마다 서걱이며 낙엽이 목마른 소리를 냅니다.
빨갛게 물이 들어 그렇게 아름다운 낙엽은, 하나하나 주워들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한 잎 낙엽은 그 자체로 너무나 신비롭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날 낙엽 하나를 주워 피정동안 묵상하던 성경책에 꽂으며 중얼거리던 것을 이렇게 노트에 옮겨 놓았습니다.
"저기 낙엽들을 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잖아. 하나같이 썩고 벌레 먹고 바람에 찢긴 것들뿐, 그런데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
삶도 죽음도 두려워할 것 없어. 비바람이 몰아치면 나뭇잎처럼 그냥 펄럭이며 살아. 언젠가 죄스럽고 상처 난 내 인생이 하느님 손바닥에 한 잎 낙엽으로 떨어지는 날, 그래도 나를 아름답게 바라보실 거야. 내가 이렇게 낙엽 하나를 아름답게 바라보듯이....."
ㅡ(말씀지기)에 실린 편집자 레터 전문(全文)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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