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포도송이와 도넛 l 권상희 수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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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병규 | 작성일2006-10-28 | 조회수664 | 추천수11 | 반대(0) 신고 | |
포도송이와 도넛 오늘은 한 달에 한번 위병소 병사들을 위해 생일잔치를 여는 날이다. 메뉴는 포도와 도넛.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메뉴지만 두 간식을 선택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이곳 부대 앞에는 포도밭이 많이 있어서다. 위병소 병사들이 근무하는 바로 앞에도 포도밭이 있다. 무더운 여름날, 한 병사에게 포도를 먹어봤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먹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병사는 포도밭 주인아저씨가 포도 끝물이 되면 병사들에게 포도를 나눠줬다는 얘기를 선임들을 통해 들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이번 간식으로 포도를 선택한 것이다. 도넛은 이른 저녁을 먹는 병사들의 출출한 배를 채워줄 간식이다. 이번 파티 때는 새로 전입 온 이등병도 몇 있고 해서 생일을 맞은 병사 케이크와 이등병들 케이크 이렇게 두개를 준비했다. 생일잔치가 있는 날은 장을 봐야 하기에 분주하다. 시장가는 길에 포도 두 상자를 미리 사서 봉고에 싣고 시장에 가서 도넛과 케이크, 생일선물을 사다 보니 어느 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양이 많아 한 번에 다 운반할 수가 없어서 몇 번에 나눠 날라야만 했다. 돌아와 냉장고에 케이크와 포도를 넣어놓고, 병사 개인교리를 마친 후 병사와 함께 포도를 씻어 냉장고에 다시 보관했다. 시간이 되자 많이 기다렸다는 듯이 병사들이 뛰어나와 간식과 선물을 생활실로 날랐다. 정돈된 내무실에 서너 개 초가 꽂힌 케이크가 놓이고 준비해간 간식들을 접시에 나눴다. 생일을 맞은 병사와 이등병들이 케이크 앞에 옹기종기 모이고 다른 병사들은 주인공 병사들 주위에 모여 박수와 노래로 그들을 축하해준다. 주인공 병사들은 좀 쑥스럽긴 하지만 오늘, 이 시간을 행복해 한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자연스레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선임과 후임 관계의 어려움을 이런 생일파티가 조금은 부드럽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서로 생일을 기억해주는 가운데 작게나마 이들 안에 상대에 대한 사랑의 꽃을 피우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위병소 생일잔치. 언제나 생활실에 사랑의 여운이 감도는 것을 느낀다. 모든 것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를 반겨주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과 고요한 부대의 적막뿐이지만, 마음은 환하고 따뜻하다. 그래서 늘 하느님께 기도를 드린다. 제게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고 그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이런 공간과 시간을 허락하심에 감사를 드리며…. - 권상희 수녀 (군종교구 안양 충의본당, 인보성체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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