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10월 27일부터 30일 사이 어느날, 그는 아침 일찍 생오귀스탱 성당으로 갔다. 그에게는 아직 확실한 결심은 없었으나,
자기도 확실히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움직여지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그는 고해소에 있는 위블랭 신부를 만나러 갔다.
그는 꿇어앉지는 않았으나 종교에 대해서 가르쳐 주기를 원했다.
"무릎을 꿇으시오. 하느님께 고해를 하시오. 그러면 믿을 수 있을 겁니다."
신부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하고 푸코는 거부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온 것은 아닙니다."
"고해를 하십시오!"
신부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푸코는 자유롭게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푸코는 무릎을 꿇고 지금까지의 생활을 숨김 없이 모두 고해했다.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때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모든 죄의 사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한 번도 잊어 버린 일이 없는 듯한, 강하고 확고한 신앙을 다시 찾았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사제는 그에게 "아직 아침 식사 안하셨지요?" 하고 물었다.
그리고 아직 하지 않았다는 대답을 듣고는 즉시 성체를 영해 주었다.
29세의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는 드디어
운명을 결정짓는 첫걸음을 내디디었다.
즉 교회의 문턱을 넘어섰던 것이다.
그 전에는 어떻게 하면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를 몰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엇 때문에 이 생오귀스탱 성당 주위를
원망과 불확실성에 주저하면서 헤매고 있었던가를 오늘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찾아낸 환희는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것을 압도하고 말았다.
오직 한 가지 문제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살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단 하루 사이에 그의 생활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10년 동안이나 신앙생활을 멀리했던 그는 매일 위블랭 신부가 드리는 미사에 참례했다.
그는 매주일 고해성사를 보았으며 거의 날마다 성체를 영했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제가 그를 이끌었으며,
그도 또한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대로 응했던 것이다.
푸코는 겨우 회개했을 뿐이다.
회개는 종교에 있어서 마지막은 아니지만,
푸코의 회심은 그의 모든 존재를 진정으로 반역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의 우여곡절을 겪은 뒤의 이 회심으로 그의 생활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즉 영구적인 혁명의 결정적 전환점이 된 것이다.
12년간의 무신앙과 2년 반 동안의 여행,
이 신비적인 여행을 마친 후에 그는 생오귀스탱의 성당 문을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에 가까이 가는 길을 발견하는 데는 육신과 영혼이 새롭게 변화해야 했고,
여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1886년 10월 말, 드디어 푸코는 완전히 정복되었다.
<하느님께서 존재한다고 믿게 되자마자, 나는 하느님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나의 수도 생활에 대한 성소는 나의 신앙과 동시에 시작된 것이다.>
그때 그는 생오귀스탱 성당에서 위블랭 신부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나의 하느님은 이렇게 가장 비천한 자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하느님으로부터 그것을 빼앗을 수가 없었다."
이 말은 푸코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을 찌르며 그의 일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그는 이미 하느님을 본받아서
그 시대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비천한 자리를 찾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가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길을 그것뿐이기 때문이었다.
- 성바오로출판사, <사하라 사막의 성자 샤를 드 푸코>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