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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하라 사막의 성자 - 샤를 드 푸코
작성자송규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6-10-28 조회수770 추천수7 반대(0) 신고
사하라 사막의 성자/샤를 드 푸코
 근대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수도자였던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는 
1858년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당시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였기에 그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신자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린 나이에 양친(兩親)을 여의면서 그는 신앙의 길을 버리게 된다.
그리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장교가 되어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반란군 진압에 투입되어,
상관의 명령에 따라 반란군의 심장을 겨누어 총을 쏘면서 그는 인생에 대하여 큰 회의(懷疑)를 느끼게 된다. 

그 후 군대를 스스로 떠나 학자로서 모로코를 탐험하던 중, 
그 곳의 이슬람 교도들이 깊은 신앙 속에서 신앙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하느님을 향해 시선(視線)을 돌리고 다시 가톨릭으로 귀의(歸依)한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의 수도원 생활을 거쳐 그의 나이 43세 되던 1901년 신부 서품을 받은 후,
당시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여겨지던 아프리카 사하라의 베니아베스로 들어가, 
1916년 12월 한 토착민이 쏜 총에 맞아 숨질 때까지 15년 동안 
그곳에서 원주민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어느 날 푸코는 나무를 보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 
나무는 떨어지는 자신의 잎이나 부서져 나가는 가지에 대해 아무런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떨어지지 못하도록 기를 쓰거나 떨어지는 것을 잡으려고 전혀 안달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저 의연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재물(財物)이나 건강이나 생명 때문에 염려하고 절망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하찮은 나무보다도 더 못한 존재로 전락(顚落)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을 믿는 믿음으로 근심하거나 탄식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 ‘하느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하느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고 말하였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 하였다.

‘하느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신앙이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는가? 
진정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가? 
그러나 정말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가? 
진정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 부족함이 없는 신앙을 갖고 있는가?


진짜 향나무와 가짜 향나무의 차이가 언제 드러나는가? 도끼에 찍히는 순간에 나타난다.
향나무는 찍힐수록 향기를 더욱 진동하지만, 가짜는 찍을수록 도끼의 날만 상하게 한다. 
겉모습은 똑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찍히면서 비로소 진위(眞僞)가 판가름 나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하느님을 믿는 자(者)인가 아닌가는 평소에는 판가름 나지 않는다. 
오직 결정적일 때에 드러나는 법이다. 
내 건강이, 내 재물(財物)이, 내 생각이, 내 뜻이 찍히고 떨어지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깨어져 나갈 때,
바로 이러한 순간에서도 우리가 하느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정말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결정적일 때를 위해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일 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믿음이 필요할 때에 
비(非) 신앙적인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참된 신앙인(信仰人) 일 수가 없는 것이다.

샤를르 드 푸코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처럼 결정적일 때 오히려 비 신앙적으로 
처신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을 보기보다는 자기자신을 보기 때문이요,

둘째는 하느님보다는 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더 크게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적절한 지적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들여다보면 탄식 밖에 더 나오겠는가?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극대화하여,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요, 
그 누구보다 비참한 사람이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자라는 피해망상에 젖는다면 
절망 외에 무엇을 더 얻을 수 있겠는가? 

 

 푸코가 쓴  기도문을 옮긴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제 영혼을 바치옵니다.

    하느님은 

    내 아버지시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

 

'나자렛의 예수님'을 사랑한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
샤를 드 푸코는 1858년 9월 18일,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 모로코를 탐험하던 중
모슬렘들의 깊은 신앙을 보고 충격을 받아 그리스도교 신앙을 되찾고,
위블랭 신부의 권고로 성지순례를 하던 중
나자렛에서 깊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1890년,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들어가게 되는데
처음에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평화를 누리나
수 년 간의 시련 후, 자신의 내면에서는
나자렛의 열정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게 되어 떠납니다.
나자렛의 예수님을 닮기 위해
글라라 수도원의 잡역부로 3년간 지내며,
1901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후,
가장 버림받은 사람을 찾아
사하라 사막의 베니아베스와 타만라셋에 이르게 됩니다.

고행과 은거를 통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과 영적인 가치를 찾으면서
사막에서 모슬렘들과 함께 하던 푸코는
불행히도 원주민에게 살해되었는데
사막에 뿌려진 그의 피는
은자들의 고통스런 소명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슬렘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삶으로써
만인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샤를 드 푸코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

      1886년 10월 27일부터 30일 사이 어느날, 그는 아침 일찍 생오귀스탱 성당으로 갔다. 그에게는 아직 확실한 결심은 없었으나,
      자기도 확실히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움직여지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그는 고해소에 있는 위블랭 신부를 만나러 갔다.
      그는 꿇어앉지는 않았으나 종교에 대해서 가르쳐 주기를 원했다.

       

      "무릎을 꿇으시오. 하느님께 고해를 하시오. 그러면 믿을 수 있을 겁니다."
            신부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하고 푸코는 거부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온 것은 아닙니다."
       

            "고해를 하십시오!"
            신부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푸코는 자유롭게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푸코는 무릎을 꿇고 지금까지의 생활을 숨김 없이 모두 고해했다.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때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모든 죄의 사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한 번도 잊어 버린 일이 없는 듯한, 강하고 확고한 신앙을 다시 찾았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사제는 그에게 "아직 아침 식사 안하셨지요?" 하고 물었다.
      그리고 아직 하지 않았다는 대답을 듣고는 즉시 성체를 영해 주었다.

       

      29세의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는 드디어
      운명을 결정짓는 첫걸음을 내디디었다.
      즉 교회의 문턱을 넘어섰던 것이다.
      그 전에는 어떻게 하면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를 몰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엇 때문에 이 생오귀스탱 성당 주위를
      원망과 불확실성에 주저하면서 헤매고 있었던가를 오늘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찾아낸 환희는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것을 압도하고 말았다. 
       

      오직 한 가지 문제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살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단 하루 사이에 그의 생활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10년 동안이나 신앙생활을 멀리했던 그는 매일 위블랭 신부가 드리는 미사에 참례했다.
      그는 매주일 고해성사를 보았으며 거의 날마다 성체를 영했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제가 그를 이끌었으며,
      그도 또한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대로 응했던 것이다.

       

      푸코는 겨우 회개했을 뿐이다.
      회개는 종교에 있어서 마지막은 아니지만,
      푸코의 회심은 그의 모든 존재를 진정으로 반역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의 우여곡절을 겪은 뒤의 이 회심으로 그의 생활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즉 영구적인 혁명의 결정적 전환점이 된 것이다.
      12년간의 무신앙과 2년 반 동안의 여행,
      이 신비적인 여행을 마친 후에 그는 생오귀스탱의 성당 문을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에 가까이 가는 길을 발견하는 데는 육신과 영혼이 새롭게 변화해야 했고,
      여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1886년 10월 말, 드디어 푸코는 완전히 정복되었다.

       

      <하느님께서 존재한다고 믿게 되자마자, 나는 하느님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나의 수도 생활에 대한 성소는 나의 신앙과 동시에 시작된 것이다.>

       

      그때 그는 생오귀스탱 성당에서 위블랭 신부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나의 하느님은 이렇게 가장 비천한 자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하느님으로부터 그것을 빼앗을 수가 없었다."

       

      이 말은 푸코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을 찌르며 그의 일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그는 이미 하느님을 본받아서
      그 시대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비천한 자리를 찾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가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길을 그것뿐이기 때문이었다.

                                     - 성바오로출판사, <사하라 사막의 성자 샤를 드 푸코>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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