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참된 가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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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경재 | 작성일2006-11-12 | 조회수735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참된 가난> - 엑카르트가 말하는 영적 가난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마르 12,38-44)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가난한 과부를 비교하시면서 진정 가난한 모습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가난에는 외적인 가난뿐만 아니라 영적인 가난도 있습니다. 단순히 물질적인 가난만을 의미 하지 않습니다. 외적인 가난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나머지 기꺼이 가난의 생활을 짊어진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이 외적인 가난도 선하고 칭찬 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당장 끼니를 걱정하고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가난도 영적인 가난이 결여 되어 있다면 그는 참으로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마태오복음서에서 말하는 영으로 가난한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많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율법학자들은 사실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권위와 재산, 명예와 지식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하느님과 통한다는 자의식까지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더 가지려고 애쓰며 행동하였습니다. 남들 눈에 띄기, 인사받기, 높은 자리와 윗자리 차지하기, 기도 독점하기 등등입니다. 그러면서도 재물에 눈이 어두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파렴치를 범했습니다. 가장 잘 돌봐 주어야할 과부들(신명 27,19)의 재산마저 등쳐 먹고 조금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다 지킨다고 우겼지만 실제로는 신명기의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또 하나 그들은 교묘하게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뜯어냈습니다. 성전 앞에다 헌금 궤를 설치하여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헌금하도록 강요했던 것입니다. 보살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서 오히려 돈을 뜯어 낸 셈 입니다. 헌금 궤에 들어온 돈을 긍휼 사업에 쓰지 않았습니다. 성전을 화려하게 꾸미는 데에만 사용하였습니다. 나머지도 모두 권력자들이 나누어 사용하였습니다. - 참조. 성서 못자리 루가복음 나눔터 p.282. 안병철 신부님
그 과부가 자신이 살아야할 생활비를 다 집어넣는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 그녀를 칭찬하셨지만, 한편으로는 이 세태를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성전세만으로도 모자라 갖가지 방법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뜯어내는 작태입니다. 이 점은 현대의 우리들도 반성해야 할 점입니다. 과연 자선과 사회사업에 얼마나 투자를 하는 지, 성전을 유지하고 꾸미는 데만 돈을 쓰지나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에 비해 그 가난한 과부는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두 렙톤을 전부 봉헌하여 당장 끼니마저 하느님께 맡기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그 돈이 실제 어디에 쓰이는지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봉헌했던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엑카르트가 말하는 가난의 정의를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그는 가난에 대해 세 가지 요점을 말합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가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가난”,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가난”이 그것입니다. 언뜻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엑카르트의 설교 15.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누군가가 자신의 바람을 아직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가난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뜻으로 하느님의 뜻을 만족시키려 하는 사람일뿐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만든 참회방법과 외적 수련 방법에 얽매여 이기적인 자아에 집착하는 자들입니다. 율법학자들도 스스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가난을 구했다고 말할 것이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시장터에서 하느님께 다가가는 길을 보여 준다고 외친 것이며, 자기 길이 바른길이니 따라오라고 우긴 꼴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거래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가 이러저러하게 봉헌할 터이니 이러저러한 것을 베풀어 주십사하고 장사한 셈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처음 만드신 대로 움직이고 따르는 것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가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더러 당신을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만드셨습니다. 이웃을 제 몸처럼 여기라고 만드셨습니다. 그것만 생각할 뿐입니다. 나머지는 다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저는 처음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가난”을 어떻게 새겨들어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엑카르트가 말하는 “무지”는 인간의 오감을 통해서 얻어진 지성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부어주신 빛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 대목을 묵상하며, 마치 그 과부가 자신이 봉헌한 돈이 진실로 하느님 사업 쓰이는지 아닌지 알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쓰일 것인지 따지지 않고 그냥 오로지 바친 것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지력을 뛰어 넘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일에 대해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진실 된 가난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가난”을 실천하는 사람은 당장 끼니를 굶더라도 그것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딴 주머니를 챙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과부가 무엇을 기도하며 성전궤에 자신이 지닌 모두를 넣었을까요? 당장 먹을 양식을 구했을까요? 자신의 건강? 평안? 아마도 그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가장 간구했을 것입니다. 이 과부는 영혼과 육신을 상징하는 두 렙톤을 바침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봉헌한 것입니다. 영적인 가난이란 바로 이 과부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은 우리 몸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작용을 우리가 방해할 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모두 영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영은 우리와 분리 될 수 없습니다.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려면 영으로 가난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으로 가난한 자라야 진정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소유권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분의 것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에게 임대 되었을 뿐입니다. 소유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임대된 것이 몸이든, 영혼이든, 감각이든, 힘이든, 외적인 재화이든, 명예든, 벗이든, 관계이든, 작은 집이든, 대저택이든 간에 말입니다. - 마이스터 엑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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