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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봉헌의 축복-----2006.11.12 연중 제32주일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6-11-12 조회수802 추천수5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님 강론 말씀)

 

 

2006.11.12 연중 제32주일                                        

열왕상17,10-16 히브9,24-28 마르12,38-44

                                                        

 

 

 

 

 

봉헌의 축복

하느님 보시기에 참 진실한, 참 좋은, 참 아름다운,

진선미(眞善美)의 삶은 무엇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봉헌의 삶입니다.
진정 봉헌의 삶을 살 때 참 진실하고, 좋고, 아름답습니다. 행복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봉헌의 삶을 잘 살 수 있을까요?


삶이 하느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을 때입니다.

 

삶은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순전히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내 받은 선물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선 생명부터가 선물이요,

이 좋은 날씨에 아름다운 가을 단풍산도 선물이고,

주변의 좋은 이웃들도 선물이요,

함께 사는 형제들도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미사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눈만 열리면 하느님의 선물로 가득 깔린 세상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자각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봉헌의 응답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봉헌의 삶입니다.

 

얼마 전 단풍잎들 가득 깔린 길을 걸으며 써놓은 ‘가을에는’이란 글입니다.

 

가을에는

가을에는
당신 길옆에
나무가 되고 싶다.
은행나무나
단풍나무였으면
더 좋겠다.

그냥 말없이
내내 지켜 서서
당신 길 위에
내 노란 사랑
빨간 사랑
가득 깔아드리고 싶다.
당신 길 위에

 

가을 길 위에 가득 깔린 가을 나무의 고운 단풍잎들,

마치 길이신 주님께 감사의 찬미의 봉헌의 표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사랑의 응답이 봉헌의 삶이요,

이런 봉헌의 삶은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됩니다.

찬미와 감사의 봉헌이요, 사랑과 진실의 봉헌입니다.

 

봉헌의 진위를 알아보는 잣대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찬미와 감사의 봉헌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수도자들이 바치는 매일미사와 성무일도,

그대로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통한 봉헌입니다.

아니 전례뿐만이 아니라 일상의 전 삶이,

생각과 말과 행동 전체가 찬미와 감사의 봉헌의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수도자의 정주나 가난, 정결, 순종 서원도

내 전부를 하느님께 바친다는 봉헌의 표현이요,

수도자의 옷도 머리를 깎는 삭발 역시

주님께 나를 바쳤다는 봉헌의 표지입니다.

 

그러니 봉헌의 삶을 산다는 이들이

부를 축적하고 높은 자리를 탐하는 것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흡사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사랑과 진실의 봉헌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사랑과 진실이 담기지 않은 선물은 하나마나 이듯,

사랑과 진실이 담기지 않은 봉헌은 하느님께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부류 사람들의 비교가 퍽이나 흥미롭습니다.
율법학자와 부자와 가난한 과부입니다.

마치 성당내 사람들의 구성과 흡사합니다.

율법학자와 같은 사제가 있을 수 있고,

다음에 부자 신자들과 가난한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성당일겁니다.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은 복음 장면입니다.

율법학자들의 허영심과 교만,

비단 사제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경향이자 가능성입니다.


과연 자리나 직위나 명예나 재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들 몇이나 될까요?

 

우리가 율법학자의 자리에 있다면

과연 교만이나 허영이 없이, 겸손하고 진실할 수 있을까요?

 

어째든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

하느님 눈에 초라하기 그지없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겉모습을 보시는 게 아니라

마음의 진실을 보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과연 율법학자에게 장식과 치장, 허영과 위장의 옷을 모두 벗었을 때

남는 진실은 얼마나 될까요?

 

하느님의 저울에 달아보면 참 가볍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대로 오늘날의 외부 지향적 허영을 쫓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러니 외적인 것에 쉽사리 현혹되는 우리의 눈은 얼마나 불완전한지요?
율법학자와 부자는 물론 우리의 위선을 폭로하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찬미와 감사, 진실과 사랑의 봉헌의 모범입니다.


하느님 눈에 율법학자나 부자가 부유한 빈자라면,

가난한 과부는 가난한 부자요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화려한 위장과 위선을 꿰뚫어 마음의 진실을 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벌거숭이로 드러납니다.


봉헌금의 액수를 보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봉헌금에 담긴 사랑과 진실, 겸손을 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주님께 칭찬 받은 이는

큰돈을 봉헌한 부자가 아니라 렙톤 두 닢을 넣은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봉헌은 자신의 표현입니다.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표현, 사랑과 진실, 겸손의 표현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가난한 과부의

찬미와 감사, 사랑과 진실, 겸손의 삶이 그대로 표현된 과부의 헌금입니다.


깊이 보면, 믿는 이들의 삶은 모두가 봉헌의 삶입니다.


심지어는 죽음도 마지막 최후, 최고의 봉헌이 될 수 있습니다.

 

작은 봉헌생활에 충실할 때

장엄한 낙조와도 같고 아름다운 가을 단풍과도 같은

봉헌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러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새삼 봉헌이 축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 받은 선물에

감사와 찬미, 사랑과 진실로 봉헌할 때

햇빛처럼 쏟아지는 은총의 축복입니다.

 

오늘 1독서 열왕기 상권에 나오는 사렙타의 가난한 과부는

지니고 있던 밀가루 한 줌과 약간의 기름 전부로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봉헌했을 때,

단지에는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합니다.


그렇습니다.


봉헌의 축복입니다.

아니 봉헌의 삶 자체가 축복의 삶이요 행복한 삶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봉헌에

하느님은 부활의 축복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전존재를 주님께 봉헌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은 당신의 성체성혈의 축복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도다.”(시편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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