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프로레스링 시리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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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배봉균 | 작성일2006-11-21 | 조회수704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
프로레스링 시리즈
1950년대 중반 전쟁의 아픔이 채 가시기 전, 피난지 항도(港都) 부산에서 한국 프로레스링이 자생(自生)의 싹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장영철을 비롯한 몇 명의 젊은이들이 전문적인 프로레스링 코치도 없이 주한미군의 AFKN-TV와 현해탄을 건너오는 일본 TV의 프로레스링 경기 중계를 보고 프로레스링 흉내를 내면서 여러가지 기술을 익혔습니다.
아마츄어 레스링과 권투, 유도, 당수를 하던 이들은 전혀 새로운 운동인 프로레스링을 열심히 연습하여, 1957년 초 부산 자갈치시장 내에 있는 국제종합체육관에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프로레스링 시합을 개최할 수 있었습니다. 출전 선수는 장영철 선수와 전진주 선수였습니다.
1950년대 후반, 서울로 자리를 옮긴 프로레스링 선수들은 변두리에 도장을 열고 선수확보와 후진양성을 하여 빈번히 프로레스링 대회를 개최하고, 지방순회 시합도 자주 갖게 되었습니다. 1961년에는 정식으로 대한체육회 산하 단체로 등록할 수 있었습니다.
프로레스링 시합을 자주 볼 수 있게 되니 자연히 시합을 알리는 포스타도 동네 골목이나 전신주에 나붙게 되었는데, 포스타에는 구렛나루를 기른 한국 프로레스링의 지존(至尊) 장영철 선수를 중심으로 하여 당수의 천규덕, 백곰 우기환, 고릴라 이석윤, 사자 조경수, 거인 박송남, 박성모 등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당시 포스타의 특이한 점은 팬티차림으로 폼을 잡고 있는 우람한 체구의 선수 사진 밑에 선수들의 몸무게를 적어 놓았는데, 요즘처럼 몇 Kg이 아니라 몇 관으로 표시했다는 것입니다. 주니어 헤비급에 해당되는 선수들은 보통 23관(84,5Kg)이었고 헤비급 선수들은 26,7관(92~96Kg), 거인 박송남, 박성모 선수가 32관(120Kg)정도 인 것으로 기억됩니다.
헤비급 선수로는 장영철, 천규덕, 우기환, 조민영, 송학수, 거인 박송남, 박성모 등 그리 많지않은 선수들이 있었고, 주니어 헤비급 선수로는 이석윤, 홍무웅, 옥태진, 전진주, 조경수, 안명길, 오문환, 김두만, 등 좀 더 많은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대머리 송학수씨는 시합 중 장파열의 부상을 입어 선수 생활은 못하고 심판을 보았습니다. 홍무웅 선수 등 몇 명은 후에 몸무게가 늘어 헤비급 선수가 되었습니다. 거인 박송남, 박성모 선수의 키가 195~197Cm로 요즘 민속씨름 최홍만 선수의 키 218Cm보다는 훨씬 작았습니다.
장영철 선수는 특유의 구렛나루와 날카로운 눈매의 소유자로, 기술도 다양하여 ’목감아 치기’와 ’드롭킥’ ’훌라잉 헤드 시저스’ 등의 화려한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초창기 한국 프로레스링계의 대부요 지존이었습니다.
1963년 2월 장충체육관이 개관하고 TV 중계도 시작하게 되자 ’고기가 물 만나듯’ 프로레스링은 활기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일류 선수들은 아니지만 외국선수들을 초청하여 국제시합도 갖게되었고, 옥경자 선수 등의 여자 선수들도 등장하여 여자 프로레스링 시합도 심심치않게 열렸습니다. 이때가 한국 프로레스링의 ’제 1의 전성기’였습니다.
장충체육관이 개관하기 전에는 권투나 레스링 등의 큰 시합은 주로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의 배구 경기장이거나 수영장에서 특설 링을 만들어 놓고 거행했습니다. 1962년 가을, 서울운동장 배구장에서 한국 프로레스링 쥬니어헤비급 챔피언 타이틀매치가 토나멘트로 열렸는데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저도 참관했었습니다. 저는 흥미진진했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먼저 장영철 선수와 신인 레슬러 2명과의 1대 2 경기가 있었는데 장영철 선수가 2명의 선수를 국민학생(초등학생)들 데리고 놀 듯이 놀다가 일방적으로 승리했습니다.
두 번째 게임은 당수 5단의 육군상사 출신 천규덕 선수와 팔뚝으로 얼굴을 문지르는 ’무두질’이 특기인 맷집 좋은 백곰 우기환 선수와의 시합이었습니다. 심판은 역시 대머리 아저씨 송학수씨가 보았습니다. 접전 끝에 ’당수(태권도) 치기’가 특기인 천규덕 선수가 폴승을 거두었습니다.
드디어 오늘의 메인 이벤트인 한국 프로레스링 주니어헤비급 타이틀 전이 시작되었습니다. 8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토나멘트로 진행되는데, 출전한 8명 선수의 면면을 살펴보면, 고릴라 이석윤, 타이거 안명길, 비호 전진주, 사자 조경수, 왕서방 옥태진, 약관 20세의 당수 3단 홍무웅, 유도 3단 오문환, 현역 해병 장위수 선수였습니다.
불꽃 튀는 열전 끝에 고릴라 이석윤 선수가 쥬니어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습니다.
1965년 6월 세계적인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제자로 미국과 일본 무대에서 크게 활약하던 김일 선수가 8년만에 귀국하였습니다. 김일 선수의 귀국은 그때까지 부동(不動)의 에이스인 장영철 선수를 중심으로 태동(胎動)하여 그런대로 호황을 누리기 시작하던 한국 프로레스링 계에 엄청난 변화와 돌풍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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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반 부산에서 장영철 등 몇 명의 젊은이들이 한국 프로레스링의 자생(自生)의 싹을 틔우고 있을 무렵, 호남지방에서는 고흥 출신의 장사 김일이 씨름판을 평정하고 있었습니다. 잘 생긴 얼굴에 체격 좋고 힘 좋은 김일, 수많은 씨름판의 트로피와 황소는 언제나 그의 차지였습니다.
더 이상의 상대가 없던 김일은 풍문(風聞)으로 "일본에서는 프로레스링이란 서양씨름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 스모와 유도를 하던 많은 선수들이 프로레스링으로 전향하여 활동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역도산이란 선수는 세계 제 일인자라 하더라."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프로레스링의 세계 제 일인자인 역도산 선수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안 김일은 일본으로 건너가 역도산의 제자가 되어 프로레스링에 입문(入門)할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1957년 부산에서 한국 프로레스링이 처음으로 정식 시합을 가질 무렵, 김일은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일본행 밀항선(密航船)에 몸을 실었습니다.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역도산을 찾아간 김일을 역도산은 제자로 받아 주었습니다. 그 날부터 피나는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역도산은 김일에게 "사각의 링에서 살아 남으려면 자신만의 특기가 하나 있어야 하는데, 너는 한국인이니 박치기를 특기로 정하여 열심히 단련하여라." 라고 말하고, 그의 이마를 골프채로 가격하는 등 강도(强度)높은 훈련을 시켰습니다.
하체(下體)의 힘을 기르기 위하여 김일은 하루에 3,000번씩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反復)하고, 새끼를 감아 놓은 기둥에 이마가 부서지도록 박치기를 해댔습니다. 역도산 스승은 "연습만이 살길이다. 훈련이나 시합에서 얻은 부상(負傷)은 연습을 통하여 치료해야 한다" 라고 김일 선수를 독려(督勵)했습니다.
1958년 12월, 드디어 김일 선수는 ’오오키 긴따로(大木 金太郞)’라는 링-네임으로 데뷔전을 가졌습니다. 그 후 5년간 일본 국내무대에서 맹 활략을 펼친 김일은 1963년 미국으로 원정(遠征) 진출하여 덩치 큰 외국선수들과 많은 시합을 소화해 냈습니다.
1963년 12월 10일, ’관수 지르기’가 특기인 일본인 2세 Mr. 모토 선수와 한 조를 이뤄 김일 선수는 WWA 세계 태그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獲得) 했습니다. 승리의 기쁨도 잠간, 며칠 후 12월 15일 미국에 있는 김일에게 일본으로부터 청천벽력(靑天霹靂)의 소식이 전해 왔습니다.
김일에게는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은 역도산이 하급(下級) 야쿠자의 칼에 맞아 복막염(腹膜炎)으로 사망한 것입니다. 밀입국자(密入國者)의 신분이었던 김일은 역도산이 신원 보증인 겸 후견인(後見人)이였기에 일본 체류(滯留)가 가능했고 해외 원정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으로 돌아 갈 수 없게된 김일 선수는 미국에 머물며 유명 선수들과 많은 시합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1965년 4월에는 세계 헤비급 챔피언 철인(鐵人) 루테즈 선수에게도 도전(挑戰)하여 선전(善戰)했으나, 링 밖에서 날아온 의자에 머리가 찢어져 분패(憤敗)했습니다.
김일 선수의 소식을 전해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한국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1965년 6월 금의환향(錦衣還鄕)한 김일 선수는 1965년 8월 11일, 장영철 등 국내선수들과 힘을 합해 일본의 요시무라, 요시노 삿도 선수 등을 초청하여 ’극동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 전을 개최하게 됩니다.
대학생이 된 저는 비싼 입장료를 내고 장충체육관에 입장하여 손에 땀을 쥐고 경기(競技)를 관전했습니다. 토나멘트로 벌어진 경기에서 장영철 선수는 1회전은 무난히 이겨 69연승을 달성(達成)하게 되었으나 2회전에서는 탈락, 무패(無敗)의 신화(神話)는 깨어집니다.
반면(反面)에, 김일 선수는 무난히 토나멘트에서 우승하여 초대 ’극동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하게 됩니다. 일본의 반칙왕 요시무라 선수와 결승전에서 맡붙었는데, 부상(負傷)당한 김일 선수의 다리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요시무라 선수에게 고전(苦戰)하던 김일 선수는 2:1로 역전승(逆轉勝)을 거두어 챔피언 밸트를 허리에 매게 되었습니다.
군사정권의 전폭적(全幅的)인 지원을 받아 국내 데뷔전을 성황리에 끝내고, 박정희 대통령의 기대에 부응하여 극동 헤비급 챔피언을 차지한 김일 선수에게 박대통령으로부터 격려와 축하 전화가 왔습니다. 링위에서 챔피언 벨트를 찬 김일 선수는 감격하여 박대통령의 전화를 받는 장면이 TV화면을 통하여 전국에 생 중계되었습니다.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곳도 있는 법, 그 동안 고생하며 나름대로 한국 프로레스링을 일으켜 흥행(興行)을 주도(主導)하던 장영철 선수 등은 소외감(疎外感)과 허탈감(虛脫感)에 빠져 들었습니다. 또 장영철 선수를 따르는 선수들과 새로운 강자(强者) 김일 선수를 추종(追從)하는 세력으로 양분(兩分)되어, 얼마 후 {박송남 납치 감금 사건}과 {장영철의 ’프로레스링은 쇼’파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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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송남 선수는 동연배(同年輩)의 거인(巨人) 뱍성모 선수와 키와 몸무게가 거의 비슷했으나, 박성모 선수가 광대뼈가 튀어나오는 등의 일반적인 거인의 풍모(風貌)를 지닌데 반하여 보통사람의 체형이나 얼굴이 확대된 모습을 가졌었고, 프로레스링 선수로서의 자질도 고루 갖춘 미완(未完)의 대기(大器)였습니다.
스승 장영철 선수에 픽업되어 2인자인 천규덕 선수에 이어 국내 프로레스링 3인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박송남 선수는 김일 선수가 귀국하여 극동헤비급 챔피언 타이틀 전을 개최하고 챔피언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천규덕 선수 등과 함께 김일 선수의 휘하(麾下)로 들어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외국 선수들에 뒤지지 않는 체격(體格)과 소질(素質)을 지니고 있던 박송남 선수는 김일 선수의 도움으로 해외로 진출하여 프로레스링 선수로서 명예(名譽)와 부(富)를 얻으려는 꿈이 있었습니다.
1965넌 8월 11일 저녁, 김일 선수가 극동 헤비급 타이틀 시합을 성황리에 끝내고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한 것을 자축(自祝)하는 축하연(祝賀宴)이 서울 시내 모(某) 호텔에서 많은 관계(關係) 인사(人士)들이 참석한 가운데 베풀어졌습니다. 별로 심기(心氣)가 편하지 않던 장영철 선수 등은 불참(不參)했으나 천규덕 선수와 박송남 선수는 참석하였습니다.
김일 선수가 일본에서의 시합과 다음 번 국내(國內) 이벤트의 준비(準備)를 위하여 일본으로 출국(出國)하자, 배신감(背信感)을 느낀 장영철 선수는 박송남 선수에게 다시 자신(自身)의 편으로 돌아올 것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하지만 박송남은 이를 거부합니다.
이에 분개(憤慨)한 장영철 선수는 부하(部下)들을 시켜 박송남을 차(車)로 납치(拉致)하여 휴전선(休戰線)에서 가까운 외진 마을의 외딴집에 5일간 감금하고 김일 선수를 배신할 것을 강요하지만 박송남 선수는 계속 거부(拒否)하자 장영철 선수는 "너 자신이 한 일이 인도(人道)에 어긋났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나에게 다시 돌아와라" 라고 말하며 박송남 선수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 후 박송남 선수는 일취월장(日就月將), 몸무게와 실력(實力)이 늘어 한국의 ’자이언트 바바’로 불리우며 세계무대(世界舞臺)를 주름잡았습니다. 1970년대, 전성기를 맞은 박송남 선수는 미국에서 NWA 세계 헤비급 타이틀을 차지한 적도 있으며, 국내에서는 일본의 이노끼 선수와의 시합도 가졌습니다. 사회인(社會人)이 된 저도 그 시합을 보았는데 박송남 선수가 힘으로나 기술 모두 시종(始終) 우세(優勢)한 경기였습니다.
몇년 후, 안타깝게도 프로레스링 시합에서는 승승장구(乘勝長驅)하던 박송남 선수는 지병(持病)인 당뇨병(糖尿病)과의 싸움에서는 이기지 못하고 아까운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하고 말았습니다. 한국 프로레스링 계의 큰 손실(損失)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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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8월21일에 극동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전(戰)을 개최하여 성황(盛況)리에 마치고 챔피언 벨트를 획득한 김일 선수는 일본 이외(以外)의 다른 나라 유명(有名)선수들을 초청하여 규모가 더 크고 화려한 국제대회를 국내에 유치(誘致)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출국하였습니다.
일본에 입국하여 여러 번의 시합을 갖은 김일 선수는 일본에서 활약(活躍)하고 있던 노르웨이의 칼 칼슨 선수, 스웨덴의 바이킹 한센 선수 등과 터키 선수, 오쿠마 선수 등 여러 명의 일본 선수들을 한국에 초청(招請)하는데 성공했습니다.
1965년 11월 25일부터 4일간 장충체육관에서 한국의 김일, 장영철, 천규덕, 우기환, 박송남, 박성모 등 모든 선수와 일본의 오쿠마등 여러 선수, 노르웨이의 칼 칼슨, 스웨덴의 바이킹 한센, 이름이 생각 안 나는 터키 선수 등이 출전(出戰)하는 5개국 국제친선(國際親善) 프로레스링 대회가 개최(開催)되었습니다.
시합(試合)이 시작되기 전(前), 외국선수들이 입국(入國)할 때부터 온 국민들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선수들이 탄 무개(無蓋) 찦차가 카 퍼레이드를 벌이는데 150Kg이 넘는 거구(巨軀)의 외국 선수들 덩치도 덩치이지만 칼 칼슨 선수의 ’가죽 모자’와 바이킹 한센 선수의 뿔 달린 ’바이킹 모자’의 기괴(奇怪)한 모습은 장안(長安)의 화제(話題)가 되기에 충분(充分)했습니다.
25일, 26일, 27일 사흘간은 국내 선수들간의 오픈게임과 우리나라 선수들과 국제선수들간의 태그매치 등 여러 시합이 흥미진진(興味津津)하게 이어졌습니다. 장충체육관에는 시합을 직접 보려는 관객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TV는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생중계(生中繼)를 했습니다.
TV가 드믈던 그 시절 도시동네의 만화가게와 시골동네의 이장(里長)님 댁 마당에 놓인 흑백(黑白) TV 앞은 작은 극장(劇場)이 되었습니다. "관속에 누어 있던 시신(屍身)도 관 뚜껑을 열고 나와 프로레스링 중계를 보았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4일간 벌어진 5개국 국제 프로레스링 대회 마지막날 11월 28일, 이번 대회(大會)의 챔피언을 가리는 토나멘트가 온 국민의 관심(關心) 속에 벌어졌습니다. 1회전(會戰)은 한국의 장영철 선수와 일본의 오쿠마 선수의 대결(對決)이었습니다.
한국의 에이스인 장영철 선수가 일본의 오프닝 선수인 오쿠마 선수를 쉽게 이기고 무난(無難)하게 2회전에 진출하리라는 기대(期待)와는 달리, 장영철은 오쿠마에게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1:1의 상황(狀況)에서 오쿠마 선수가 장영철 선수에게 새우꺽기(보스턴 크랩)공격을 시도(試圖) 했습니다.
새우꺽기 기술(技術)이란 한 선수가 다른 선수의 두발을 자신의 양팔로 껴안고 상대방을 뒤집어 허리를 꺽는 기술로 극심(極甚)한 허리의 통증(痛症)을 이기지 못해 당하는 선수의 항복(降服: 기브 업)을 받아낼 수 있는 일종의 필살기(必殺技)입니다.
한국 지존(至尊)의 체면(體面)이 걸린 장영철 선수는 섣불리 항복도 못하고 허리가 90도 이상 꺽인채 비명(悲鳴)만 질러댔습니다. 링사이드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장영철 선수의 제자(弟子)겸 후배(後輩)들은 상황(狀況)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자 일제히 링 위로 뛰어올라 오꾸마 선수의 머리를 병과 의자로 내려치는 난투극(亂鬪劇)을 벌였습니다.
이 소동(騷動)으로 경기는 중단(中斷)되었고, 경비를 맡았던 경찰관들이 개입(介入)하고서야 사태는 진정되었습니다. 잠시 후 아직 링 위에 있던 장영철 선수는 갑자기 마이크를 잡고 "다음에는 김일 선수에게 도전하겠다."라고 절규(絶叫) 했습니다.
장영철 선수와 폭행(暴行)에 가담한 제자들은 경찰에 연행(連行)되고 5개국 국제 프로레스링대회의 나머지 시합은 속개(續開)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시합들은 ’김 빠진 맥주’ 마냥 싱겁게 이어져 김일 선수가 이번 대회의 챔피언이 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이틑날 조간신문(朝刊新聞)에는 "장영철, ’프로레스링은 쇼’다 라고 인정" 이라는 대문짝 만한 기사(記事)가 떴습니다. 그러나 장영철 선수는 오늘날까지 자신이 절대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主張)하고 있습니다.
장영철 선수가 경찰서에서 조사 받을 때 "오쿠마가 규칙에 어긋난 공격을 하기에 제지(制止)한 것이다."라고 주장하자 경찰이 "레스링 규칙에 어긋난 기술? 그게 뭐냐?"라고 다그치자 장영철이 " 보스턴 크랩(새우꺽기)은 90도 이상 꺽으면 반칙이다."라고 대답하니 경찰이 "그런 법이 어디 있냐? 그거 다 쇼 아니냐?"라고 밀어 붙여 다음날 아침 신문에 "프로레스링은 쇼." 라는 기사가 났다고 합니다.
결국(結局) 이 사건은 장영철 선수의 제자인 고릴라 이석윤 선수 등 3명의 선수를 즉심(卽審)에 회부하고, 현역(現役)이었던 김두만 선수를 군(軍) 수사기관에 이첩(移牒)하는 것으로 법적(法的)으로는 일단락(一段落)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사건의 후유증(後遺症)은 의외(意外)로 더 커져, 국제적(國際的)인 레스링 실력과 흥행(興行) 능력을 고루 갖춘 김일 선수의 귀국으로 중흥(中興)의 계기(契機)를 맞이했던 한국 프로레스링 계가 양분(兩分)되어 그 후 수년간 서로 자신의 집단(集團)이 정통(正統)임을 주장하며 주로 地方興行(지방흥행)으로 명맥(命脈)을 유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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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力道山 1924~1963)은 함경남도 출신으로 한국 이름은 김신락(金信洛)이며 역도산의 일본식 발음은 리끼도산 입니다. 1938년 14살 때, 조선일보 주최 전국 씨름대회에서 큰형 항락이 우승하고 그는 3등으로 입상하였는데 그의 소질이 일본인 형사의 눈에 띄어 일본에 가서 스모(일본 씨름)에 입문할 것을 권유 받습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에 건너가 스모에 입문한 역도산은 스모의 3등급인 세끼와께(關脇)에 올랐으나 1950년 2등급인 오오재끼를 눈에 앞두고 스모계의 조선인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반발 스모를 그만두게 됩니다.
스모계를 떠난 그는 호구지책으로 일본 야쿠자에서 경영하는 건설회사 공사현장의 자재부장으로 취직하여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1952년 일본에 경기를 하러온 세계적인 프로레스링 선수 B. 브란스 선수의 눈에 띄어 미국으로 건너가 레스링 수업을 받고 많은 경기를 치른 후 다음 해에 일본으로 돌아 왔습니다.
귀국하여 일본 프로레스링 협회를 창설한 후 외국의 유명한 선수들 특히 미국 선수들을 불러다 시합을 가졌습니다. 그는 스모의 참피언인 요꼬즈나 도요 노보리, 13년간 전 일본 무제한급 유도대회를 석권한 기무라 선수 등을 프로레스링으로 전향시켜 덩치큰 미국 선수들을 때려 눕혀 패전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황폐해 있는 일본인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었으며 불세출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프로레스링을 관전했다고 합니다. 역도산은 유도의 기무라와 한조를 이루어 미국의 샤프 형제를 물리쳐 세계 헤비급 태그 챔피언에 등극하였고, 역도산 개인적으로도 900연승의 세계챔피언 철인 루테즈에 도전하여 세계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획득했습니다.
흡혈귀 브랏쉬 선수와의 시합에서는 브랏쉬가 역도산의 이마를 줄로간 금이빨로 물어 뜯어 선혈이 낭자한 모습을 전국에서 TV로 지켜 보던 여러명의 심약한 노인들이 심장마비로 쇼크사 한 유명한 이야기는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1954년 기무라(木村)가 역도산이 '무도인의 의'를 저버렸다고 결별을 선언하고 헤어지자 프로모터들은 "옳다구나"하고 두 사람의 대전을 추진했습니다. 누가 최강인지 가려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합은 말이 시합이지 진짜 싸움(시멘트)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 경기를 저도 필름으로 봤는데, 기무라가 몇번 유도 실력으로 역도산을 메어치다가 발로 역도산의 거시기를 차는 듯 했는데 화가난 역도산이 그의 특기인 가라데 춉(당수치기)으로 기무라를 난타하여 떡으로 만들었습니다. 기무라는 잘 일어 서지도 못 했는데 그날 시합에서 갈비뼈가 몇대 나갔다고 합니다. 물론 역도산의 일방적인 승리였습니다.
역도산의 특기인 가라데 춉은 같은 재일동포 무도인 바람의 파이터 최배달(1922~1994)의 지도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스모의 기술의 하나인 '하리데(소금 묻은 손으로 상대방 얼굴 때리기)'를 응용하여 개발한 기술이라고도 하는데 그 위력이 대단했습니다.
거구의 서양선수들이 역도산의 가라데 춉을 맞고 거꾸러 지는 모습을 보며 수많은 일본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열광했습니다. 아직도 일본인들은 80%이상이 역도산이 한국인인 줄 모르고 일본인으로 알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고 합니다.
가라데 춉으로 서양의 거구들을 맥없이 쓰러 뜨리던 역도산도 일본의 하급 야쿠자 무라타 가츠지가 휘두르는 작은 잭나이프에는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1963년 12월 8일 라틴쿼터 나이트 크럽에서 술을 마시던 역도산이 화장실에 갔는데 화장실 입구에서 무라타 가츠치와 시비가 붙었습니다.
서로 발을 밟았느니 안 밟았느니, 어깨를 부딪쳤느니 안 부딪쳤느니 다투다가 역도산이 먼저 한 방 날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열 받은 무라타가 주머니에서 칼을 뽑아 찔렀는데, 상처도 크지 않고(2Cm 정도) 출혈도 심하지 않아 역도산은 15분정도 더 떠들고 놀다가 병원으로가 입원했는데 의사도 대수럽지 않게 여기고 봉합수술을 한 후 2주 정도만 치료하면 퇴원할 수 있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콜라를 무척 좋아하던 역도산이 목이 마르자 장 부근의 상처에 절대 금물인 탄산음료 콜라를 의사 몰래 마신 것이 복막염으로 번지는 화근이 되어 칼에 찔린지 일주일 만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 때 역도산의 나이가 약관 39세였으니 너무나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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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이노끼(猪木)는 1943년 2월 20일 일본 요꼬하마시(市) 에서 태어 났습니다. 1957년에 온가족이 브라질로 이민을 갔습니다. 키가 크고 운동에 소질과 취미가 있던 이노끼는 소년시절 부터 육상경기에 열중했습니다. 특히 투포환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1959년, 브라질에 원정경기 중이던 역도산의 눈에 띄어 스카우트되어 프로레스링에 입문하게 됩니다. 다시 일본으로 오게된 이노끼는 피나는 훈련과 연습을 거쳐 1960년 9월 30일 대동체육관에서 데뷰전을 갖게 됩니다. 상대는 선배선수인 오오끼 긴따로(大木 金太郞)였습니다. 이 선수가 바로 우리의 김일 선수였던 것입니다.
그러구 보면 김일 선수는 이노끼 선수의 동문 선배인 셈입니다. 이노끼에게는 또 한사람의 대 선배 선수가 있으니 자이안트 바바(馬場) 선수 였습니다. 이노끼 선수는 키가 190Cm로 작은 키가 아니지만 몸무게는 !00Kg남짓의 날렵한 체구로 레스링 선수치고는 가벼운 편이었습니다.
선배 김일 선수와 자이언트 바바 선수가 일찌기 미국 원정을 통하여 기라성같은 많은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기를 소화해 냈고 명성을 높여간데 비하여 후배인 이노끼는 그에 못 미치는게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다른 이벤트성 쇼 비지니스 감각이 풍부했습니다.
1963년 12월 15일 스승 역도산이 비명에 횡사를 하자, 그 소식은 수제자 세사람에게는 청천벽력(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것이었습니다. 김일 선수와 자이안트 바바 선수는 미국 원정 중이었고 이노끼 선수만이 역도산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밀입국자였던 김일 선수는 그 소식을 듣고도 후견인 역도산이 없기에 일본으로 들어올 수도 없었습니다.
미국에 머물다가 2년 후 김일 선수는 한국으로 귀국했고, 자이안트 바바 선수와 이노끼가 역도산 사후(死後)의 일본 프로레스링계를 짊어지고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이안트 바바 선수와 이노끼 선수는 성격이나, 경기스타일, 추구하는 노선에서 많은 차이를 드러내게 됩니다.
자이안트 바바 선수는 1939년생으로 신장 2m 10Cm의 타고난 거인 입니다. 처음에는 야구를 해 프로야구 거인팀의 투수였습니다. 바바 역시 역도산의 눈에 띄어 프로레스링에 입문하게 된 것입니다. 생긴대로 우직한 성격에 정통을 추구했습니다. 세 선수 중 덩치나 실력이나 외국에서의 지명도에서 단연 앞섰었습니다.
그가 상대선수를 링 줄로 밀었다가 반동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다리를 번쩍 들어 크고 넙적한 발로 갖다 대기만해도 가공할 파괴력을 지녔습니다. 이 기술을 자이안트 바바의 '16문 킥'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아깝게도 자이안트 바바는 1999년 심장마비로 60세의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자이안트 바바에 비해 체격이나 실력, 외국에서의 지명도에서 뒤진 안토니오 이노끼는 전일본 프로레스링 협회의 바바와 갈라서 신일본 프로레스링 협회를 만들어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게 됩니다. "바바가 프로레스링은 내부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며 정통을 추구한 반면, 이노끼는 "대외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며 순수한 레스링을 떠나 이벤트성 이종격투기도 마다하지 않는 파격을 보여 주었습니다.
자이안트 바바와의 지명도에서의 열세를 일거에 만회하기 위해 레스링 선수들과의 경기뿐 아니라 올림픽 유도 헤비급 우승자인 루스카 선수와의 이종격투기를 벌여 승리하기도 했고, 1976년에는 당시 전성기였으며 인기 절정이었던 알리와의 이종격투기도 추진하여 성사시켰습니다.
알리를 움직인 것은 뭐니 뭐니해도 머니(Money)였습니다. 우여 곡절 끝에 600만불로 낙착이 되었습니다. 경기 일자는 1976년 6월 25일 장소는 한국의 장충체육관. 경기 룰(rule) 갖고도 말이 많이 오갔었는데 결국은 알리에게 약간 유리한 쪽으로 정해 졌습니다.
1976년 6월 25일 우리나라는 난리가 났었습니다. 이노끼 보다도 알리가 온다니까... 김포공항에서 부터 알리 일행이 무개(無蓋) 찦차를 타고 서울 장안으로 들어 오는데, 이건 무슨 국가원수 오는 것보다 대단했습니다. 동원되지 않은, 자발적으로 환영나온 인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젊은 사람들은 "알리 !" "알리 !"를 연호하며 알리 일행을 뒤따라 뛰었습니다.
정작 알리와 이노끼의 한 판 승부는 싱겁기 그지없는 경기였습니다. 알리의 강 펀치를 의식한 이노끼는 시종 들어누어 알리의 정강이에 헛 발질만 해대다가 15회전을 끝 마쳤습니다. 그래도 어쩌다 이노끼 발에 맞은 알리의 정강이가 시퍼렇게 부어 올랐습니다. 알리는 이 때 맞은 정강이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생 좀 했다는 뒷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알리는 " 이노끼는 매춘부다. 들어누어서 돈을 벌기 때문에" 라고 특유의 넉살로 이노끼를 조롱했습니다. 어찌됐든 이 경기가 지금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종격투기의 효시가 된것도 사실입니다. 이 경기를 통하여 친해진 이노끼와 알리는 그 후 벌어진 북한에서의 프로레스링 이벤트에도 동행했고 1998년 4월 4일 도꾜 돔에서 거행된 이노끼의 38년 레스링 생활을 마무리하는 은퇴식에도 알리는 참석했습니다.
또 이노끼는 정치적 수완도 보여줘 1989년에는 참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프로레스링 선수 출신으로는 최초의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도 선배인 김일 선수가 오랜 선수생활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것을 알고는 일본으로 초청하여 치료해주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가슴 따뜻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프로레스링 시리즈 끝
이강길
Top Of The World - Carpen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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