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뉘른베르크의 달걀과 뉴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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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배봉균 | 작성일2006-11-22 | 조회수1,539 | 추천수10 | 반대(0) 신고 | |||||||||||||||||||||||||||||||||||||||||||||||||||||||||||||||||||
뉘른베르크의 달걀과 뉴턴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은 낮과 밤의 반복에 의해 날을 세고 달력을 만들었으며, 그림자의 변화에 따라 시간의 경과를 알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시계(時計)는 1개의 막대를 땅위에 세웠던 ‘그노몬(Gnomon)’이라는 해시계였습니다. 고대이집트에서는 ’오벨리스크‘가 그노몬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해시계는 밤 동안이나 날씨가 궂을 때는 사용할 수 없고, 시간을 세분하는데도 적합하지 않았기에 이 결점을 보완(補完)하여 물방울을 이용한 물시계 ’클랩시드라(Clepcydra: 물항아리)’가 고안(考案)되었습니다.
그 뒤 물을 모래로 바꾼 모래시계, 불시계(양초, 램프) 등이 고안되었으며, 각각의 특징에 따라 근세까지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계들은 정밀도(精密度)도 떨어지고, 늘 해시계와 비교하면서 시간을 등분(等分)하는 보조적(補助的)인 장치에 불과 했습니다.
유럽에서는 18C 중엽부터 19C 말엽에 걸쳐 1년마다 평균(平均)을 내어 평균태양일(平均太陽日)을 정하고 이것을 24등분 시(時, hour), 시를 60등분하여 분(分, minute), 분을 60등분하여 초(秒, second)로 하는 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기계시계(機械時計)가 발명된 것은 14C 전후로 봅니다. 14세기가 되자 북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의 주요도시에서는 시간을 알리는 장치가 있는 공공시계탑(公共時計塔)을 앞 다투어 설치하였습니다. 당시의 시계는 시계바늘이 1개 뿐이었고,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clock(시계)의 어원이 종(鐘)이 되듯이 종으로 시각(時刻)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공공시계가 실내에 맞는 크기로 소형화된 것은 14C 말이었으며, 일반의 부유한 가정에서 볼 수 있게된 것은 16세기가 되면서부터 입니다.
태엽의 발명에 의해 탁상시계(卓上時計)가 만들어진 것은 15세기 전반에 이탈리아에서 였다는 설(說)이 유력(有力)합니다. 시계제조의 중심은 15세기 말 남부 독일의 뉘른베르크로 옮겨 갔습니다. 뉘른베르크의 자물쇠공 P. 헨라인이 1510년 회중시계(懷中時計)의 전신인 목에 걸고 사용하는 휴대시계(携帶時計)를 만든 것은 유명한 일입니다.
뉘른베르크의 자물쇠공 P. 헨라인이 만든 휴대시계는 그 모양과 크기가 영낙없는 달걀이었기에 ‘뉘른베르크의 달걀’이라는 별명(別名, nick name)이 붙었습니다. 다시 이 기술은 영국에 전해져서 18C에는 런던이 휴대시계 제작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시계기술자들은 균형바퀴와 태엽을 사용하였고, 18세기 중엽에는 휴대시계가 목걸이 시계에서 신사(紳士)들의 저고리 안주머니에 넣는 회중시계(懷中時計)로 변하였습니다.
19세기가 되자 많은 시계공장(時計工場)들이 설립되었고 개인에 의한 시계제작은 그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그때까지 세계 제일의 시계산업국(時計産業國)이었던 영국은 1840년 무렵부터 쇠퇴했으며, 대신 스위스가 시계산업의 메카로 부상(浮上)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초에 출현한 손목시계는 제1차 세계대전 후 크게 유행했고, 1924년에는 영국의 J. 하우드에 의해 자동태엽 손목시계가 제작 시판(製作 市販) 되었습니다. 손목시계의 정밀도(精密度) 향상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스위스의 C. E. 기욤입니다. 기욤은 니켈, 철합금으로 온도변화(溫度變化)에 신축(伸縮)이 적은 ‘인바’와 탄성변화(彈性變化)가 적은 ‘엘린바’의 발명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18세기가 시계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개량시대(改良時代)라면, 19세기는 시계 제조방법의 개혁(改革)과 진보(進步)의 시대 였고, 20세기는 시계산업에서 기계시계의 완성기(完成期)이며 혁명적인 전기, 전자시계로의 전환시대(轉換時代)가 되었습니다.
[네이버 오픈백과사전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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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더불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과학자(天才 科學者)인 뉴턴(Isaac Newton)은 1642년 12월 25일 영국에서 소 지주(小 地主)의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습니다.
뉴턴의 어머니는 뉴턴의 생후 2년만에 재가(再嫁)해서 그의 곁을 떠났고, 그는 할머니의 손에 의해 길러졌습니다. 어린 시절의 모성 결핍(母性 缺乏)이 그의 심리적 성장과정에 커다란 영향(影響)을 미쳤습니다.
즉, 논문(論文)을 발표할 때마다 그가 보인 심리적 불안감과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가 보여 주었던 지극히 비이성적(非理性的)이고 격렬(激烈)한 반응들은 어린 시절의 모성결핍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수학(數學), 물리학(物理學), 광학(光學), 천문학(天文學) 등 많은 과학 분야(科學 分野)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냈습니다.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자연현상(自然現象) 이겠거니" 하고 무심코 넘겨 버렸다면, 뉴턴은 ’만유인력(萬有引力)의 법칙(法則)’을 발견함으로써 그의 천재성(天才性)은 입증 되었습니다.
또 뉴턴은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인류가 이룩해 놓은 과학적 업적을 무한(無限)한 하느님의 섭리(攝理)에 비(比)한다면, 마치 어린아이가 바닷가 모래밭에서 예쁜 조개껍질 하나를 주워 갖고 좋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많은 업적을 남긴 학문적 활동 이외에도 뉴턴은 1696년부터 조폐국(造幣局)에서 일하면서 위조지폐(僞造紙幣) 방지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조폐국에서의 그의 눈부신 활약은 런던 위조지폐범(僞造紙幣犯)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실제로 그가 재직(하던 동안 많은 위폐범들이 교수대(絞首臺)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뉴턴의 과학(科學)은 신학(神學)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만년(晩年)에 뉴턴은 성경(聖經)의 해석(解釋)에 관심을 가지고 다니엘과 요한의 예언서(豫言書)를 해석했는데, 이 저작들은 오랫동안 비밀로 내려오다가 뉴턴이 죽은 뒤 한참 뒤에야 출판되었습니다.
[네이버 오픈백과사전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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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하게 학문연구를 하던 중년(中年)의 뉴턴이 당시 상류층 신사(上流層 紳士)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휴대시계(携帶時計) ’뉘른베르크의 달걀’을 구입하여 애지중지(愛之重之) 아끼며 사용하였습니다.
어느 겨울날, 뉴턴은 ’뉘른베르크의 달걀’을 책상 위에 놓고 연구에 몰두(沒頭)했습니다. 책상 한 구석에는 간식용(間食用) 달걀도 놓여 있었습니다. 방 한 가운데에는 스토브가 자리잡고 있고, 스토브 위의 주전자에서는 물이 팔팔 끓고 있습니다.
허기(虛飢)를 느낀 뉴턴, 책상 위에 놓인 달걀 하나를 집어들어 스토브 위의 주전자에 넣었습니다. 몇분 후 달걀이 맛있게 삶아 졌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주전자 뚜껑을 연 뉴턴은 화들짝 놀랍니다. 푸~욱 삶아진 것은 ’뉘른베르크의 달걀’ 이었습니다.
천재(天才)와 천치(天痴), 종이 한 장 차이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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