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이성 (마르 16,1~8)
신학교에서는 3학년이 되면 그리스도론을 배웁니다.
처음으로 본격적인 신학을 접하는 샘이지요.
이때는, '예수님을 못 박은 손은 예수님의 손바닥을 관통했는가,
손목을 관통했는가?', '예수님의 사인(死因)은 과다한 출혈인가,
호흡 곤란으로 인한 질식사인가?'
'예수님의 빈 무덤 사건이 역사적 사실인가, 신앙의 표현인가?'
하는 등의 갖가지 의문들이 정통적인 신학보다
더 흥미롭게 다가오던 때였습니다.
저는그 당시 성서의 모든 이야기들이 마치 거짓말처럼 여겨져서,
'내가 알던 모든 것이 다 사실이 아닐지도 몰라.'
하고 허탈해 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신학생들이 그렇게 갈등하다가
사제의 길을 포기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빈 무덤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의 이야기를 할 때면 곧장 우리네 삶 속에서
많은 것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조금 어려워집니다.
순전히 믿는 이들의 이야기이자 신앙 고백이 펼쳐져,
믿음 없이는 받아들이기 힘들 테니까요.
성서는 예수님이 ' 어떻게' 부활하셨는지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무덤이 비워져 있었다는 사실만을 전합니다.
빈무덤을 보고 부활을 믿어야 하는 기막힌 일이
바로 '믿는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은 현자와 철학자들이 말하는
윤리 규범이나 도덕 생활과 다릅니다.
그리고 이성으로 얻어지는 논리적 귀결도 아니고요.
단순하고 순수하게 나를 투신하고
내맡길 수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부활의 신비를 믿을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 사는 우리 인간이
그 한계를 초월한 분의 '신비'를
어떻게 완전히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신비가 한계가 있는 인간의 머릿속에 가둬지고
한정지워지는 것에 불과하다면,
저는 그런 하느님은 믿지 않을 것이며,
그런 신앙은 휴지통에 과감히 던져 버릴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이성을 초월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를 믿고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 놀라지 마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처형되신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분은 부활하시어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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