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증언할 기회이니 미리부터 걱정하지 마라. | |||
---|---|---|---|---|
작성자윤경재 | 작성일2006-12-01 | 조회수543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증언할 기회이니 미리부터 걱정하지 마라.>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2-19) 현대 사회가 겪은 지옥 중에 아우슈비츠의 기억만큼 처절한 상처는 없습니다. 그 원인을 한 독재자의 광기로만 돌리기엔 씁쓸한 구석이 많습니다. 그 광기에 눌려 숨죽였던 인간들이 보여준 비겁과 나약한 추종이 구역질나도록 만듭니다. 그럼에도 그 시대를 넘어 견뎌온 많은 사람들이 보여준 처절함과 의연함은 차라리 보잘 것 없는 인간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 시대 그 아픔을 노래한 많은 문학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2002 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며 헝가리 출신 작가 임레 케르테스가 쓴 ‘운명(원제; 운명은 없다)’은 그 암흑시기가 인류에게 정신적 세례시기였다는 자각을 하게 만듭니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 15세 소년 ‘죄르지’가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이야기를 그립니다. 그에게 수용소는 참상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행복을 찾으려 노력했던 장소였습니다.
헝가리는 1944년 독일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습니다. 유대인 자손이었던 죄르지에게는 자기도 모르는 채 참담한 운명이 목을 죄고 있었습니다. 아우슈비츠를 거쳐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 도착한 죄르지는 그곳에서 받은 인상을 담담하고 상세하게 기술하면서 거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집단학살 체제의 만행을 단순히 고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들과 일상을 새롭게 극복해나 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접지 않고서 말입니다. 견뎌내기 힘든 수용소 안에서도 많은 소식을 듣게 되고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신과 자기 절제를 배워나갑니다. 그는 강제 수용소에서 벗어나는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그중 가장 가능성이 적은 방법이자, 인간 본성에 속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그것은 상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수 생활 가운데서도 상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상상하는 데도 요령이 필요했습니다. 허황되지 않고 단순한 것, 예를 들면 집에 있을 때 음식을 까다롭게 먹었다든지, 시간을 낭비 했다든지,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린 일들을 반성해 보는 것입니다. 살아난다면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상상 속으로 날라 갔습니다. 그 밖에 자살하거나, 수용소 담을 넘어 탈출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는 택하지 않았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삶의 의지를 잃지 않는 것, 살고자하는 의지를 갖는 것, 이것만으로도 행복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1945년 4월, 연합군에 의해 수용소 부헨발트가 해방되면서 병상에 누워있었던 죄르지는 지친 심신을 이끌고 부다페스트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그는 아버지가 사망한 소식과 계모가 부하 직원과 재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렇게 오고 싶어 꿈꿨던 옛집은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담담하기만 합니다. 예전에 이웃에 살았던 사람들만 만나 잠시 그들과 함께 머뭅니다. 죄르지는 그들에게서 부다페스트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그들이 이 전쟁을 어떻게 겪어냈는지를 듣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모든 사건이 마치 자신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일어난 일인 것처럼,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저 큰 밀물이 한꺼번에 들이 닥쳤다가 빠져나간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죄르지는 그 모든 사건들이 그냥 ‘온’ 것만이 아니라, 그들 역시 그 사건들이 ‘오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수용소에서 겪었던 고난과 고통 대신 ‘일상과 찰나의 행복’을 설명하지만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남들이 그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어떻게 지냈느냐는 질문에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수용소에서 지낸 시간도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한 단계 이어지는 그 시간들을 차근차근 견뎌내야 했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선 그 끔찍했던 과거를 잊어야만 한다고 충고합니다. 그 말은 그저 남의 사건으로 여기라고 충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삶은 잊을 수도, 단절할 수도 없는 법입니다. 시대의 학살을 방관자로 경험한 이웃뿐만 아니라 죄르지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 만행을 함께 고발하고자 제안한 신문기자에게도 죄르지는 낯선 이질감만 느낄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참담한 심정으로 죄르지는 이웃집을 나와 ‘도저히 이어질 것 같지 않는 삶’을 다시 살아내기 위한 발걸음을 뗍니다. 그가 살아 내었던 아우슈비츠의 화장막사 굴뚝 사이로 언뜻언뜻 피어올랐던 행복에 대한 아득한 기억을 안고서 말입니다. “나는 살아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모든 관점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 사람들이 완벽하게 살아가지 못할 부조리는 없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게 악과 ‘끔찍한 일’에 대해서만 묻는다. 내게는 이런 체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도 말이다. 그래, 난 사람들이 내게 강제수용소가 지옥 같았느냐고 묻는다면 다음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작가는 책 말미에 이런 구절을 적어놓습니다. “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불가능하다.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자유와 운명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며, 그것들은 나의 의지와 관련해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현실을 단지 운명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유대인들은 스스로 자신을 영원한 피해자라는 망상 속에 가두어 버리는 비참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수용소는 죽음의 장소임과 동시에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의 연대와 결속을 다질 수 있었던 생성의 장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의 모순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려는 자신의 의지입니다. 나의 의지가 곧 나의 자유이며 그것은 결국 나의 운명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긍정이며, 이후 자신에게 닥쳐올 어떠한 극한 상황이라도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극복을 향한 몸부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그는 새로운 양식과 방법으로 그 자신을 설명합니다. “나의 행복은 그 짐이 가볍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죄르지는 그가 지닌 삶의 의지가 끔찍한 상황에서 함몰되지 않았습니다. 작가는 지상의 어떤 장소와 시간 속에 살아가든 희망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삶의 빛깔이 달라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미리부터 변론할 말을 준비하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이는 미리부터 두려움과 슬픔에 젖어 오히려 혼란과 어둠 속에 빠져버릴까 염려해서입니다. 적그리스도가 펴는 유혹에 빠져 주님을 외면할까 해서입니다. 인간이 겪는 두려움과 걱정의 대부분은 실제 일어난 일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지 모르는 일 때문에 생겨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런 일들이 생겨나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공포는 죽음보다도 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돌처럼 굳게 만듭니다. 한 없이 무겁게 만듭니다. 살아있는 것은 가볍습니다. 유연합니다. 생명의 기운이 통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생명이신 주님의 멍에는 가볍습니다.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고통의 시기에서 죄르지가 선택한 것은 매 순간 자유를 꿈꾸면서 과거의 소중한 기억과 아름다운 만남을 기억했으며, 미래에 다시 맞고 싶은 찬란한 순간을 되새기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그를 돌처럼 굳은 마음이 아니라 생명을 향한 인내와 희망 그리고 행복까지 주었습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생명의 지혜입니다. 인내로써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성령은 믿음과 희망을 사랑을 통해서 깨닫게 해주어 어떤 고난 속에서도 견디게 만들어 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