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기쁨에 넘쳐 춤추시는 예수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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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경재 | 작성일2006-12-05 | 조회수725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기쁨에 넘쳐 춤추시는 스승 예수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루카 10, 21-24) “보는 눈” 을 우리는 사고방식이니, 관점이니, 가치관이니, 역사관이니 하는 말로 설명해 주면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그만큼 우리가 쉬운 진리보다 어려운 말장난에 익숙해 져 그런가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았던 눈을 그대로 갖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뿐만 아니라 그 당시 거의 모든 인간들이 눈을 감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복음이 글자 그대로 기쁜 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학문적으로 다루어지기보다 종교적 차원에서 체험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복음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이 겪은 여러 가지 체험내용을 후대 사람들에게 전해 주기 위해서 쓰여 졌습니다. 그러기에 자신들이 그간에 지녔던 어리석은 행동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솔직하게 적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깊은 뜻을 몰랐던 부끄러운 행실을 가감 없이 적었던 것입니다. 그분을 배반할 뻔 한 이야기도, 사탄이라고 지탄 받았던 이야기도, 수난 행로에서 보인 치졸한 자리다툼 이야기도, 십자가 언덕에서 도망쳤던 이야기도, 예수님부활 후에도 의심을 품었었다는 이야기마저도 제자들은 다 복음서에 털어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치유은사와 놀라운 비유로 말씀하시는 모습, 모든 이를 받아들이는 넓은 인격과 사랑을 모두 있는 그대로 기록하여 자신들이 보았던 “눈”이 그대로 전해지길 바랐던 것입니다.
인간이 진리를 체험하고 싶다는 것은 누구나 갖는 원초적 바램입니다. 그 체험을 하기위해서 첫 번째 요구되는 것이 바로 견해차를 없애는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만 본다면 체험은 결코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면서도 자주 잊어버리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길 밖에 없다는 것도 자주 잊습니다. 꼭 다른 길이 있을 것 같아 이리저리 그 길 찾아 헤맨 것이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주제를 갖는 많은 동화나 문학작품이 있는 것도 우리는 잘 압니다. 예수회 수도자였던 김경수님이 지은 ‘영신수련과 선’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불교에서 말하는 간화선과 복음관상을 비교하며 설명합니다. 간화선에서는 1) 전승되는 화두 2) 이를 체험한 스승 3) 그 스승을 믿고 따르는 제자의 스승에 대한 확고한 신뢰 등 세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복음묵상에서는 스승은 바로 한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신뢰는 숨어 계시는 스승 예수께서 늘 자기와 함께하시면서 이끌어 준다는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복음서의 내용이 일상 속에 숨어 계신 스승 예수를 알아보게 만들어 주는 눈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화두는 이미 나와 있는 답을 가지고 질문을 찾아 가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 질문을 한 스승의 견해와 나의 견해를 좁혀 하나로 일치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때 답으로 나와 있는 것이 참선하는 사람을 이끌어 주는 가이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견해차가 줄어 하나가 될 때까지 끊임 없이 질문 받고 답을 해야 통과하여 다음 단계로 나간다고 합니다. 복음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행위에 이미 답이 담겨 있습니다. 관상자는 그리스도의 행위를 따라 그 상황에서의 주님의 언행을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기 위해 복음의 장면에 몰입하여 다른 잡념을 없애고 오로지 예수님의 눈으로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를 통하여 “몰입”, “절단”, “일치”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눈으로 보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잘못된 출발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첫 발을 잘 내딛어야 목표지점에 잘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한분이신 스승 예수께서 “보는 눈”이 얼마나 귀중한지 재삼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 “보는 눈”을 지니게 된 제자들이 얼마나 대견한지, 기쁨의 찬미를 하느님 아빠께 온 마음을 다하여 노래 부르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아마도 그날 예수님은 덩실덩실 춤도 추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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