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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라마의 울부짖음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12-28 조회수639 추천수4 반대(0) 신고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 2, 13-18)



  <라마의 울부짖음>


  P 형제님께,

안녕하세요. 매일 새벽 몸으로 만나면서 이렇게 글로 인사드리려하니 어색합니다. 감실 앞에 언제나 앉아 계신 형제님 모습이 하루라도 보이지 않으면 많이 섭섭해집니다. 미사 시작 20 분전에 도착하여 미사 후 한참동안 한 자리에 머물러 고요히 묵상하시는 모습은 언제나 제게 가르침으로 다가 옵니다. 매일 복음묵상과 소 성무일도를 바치시는 자세는 늘 본받고 있습니다.


  복된 성탄절 잘 지내셨는지요.

지난 해 성탄절 날 모처럼 포천에 있는 모현 호스피스 병원에 봉사 가던 중에 겪은 사건이 새삼스럽게 묵상되어 몇 자 적어 봅니다. 그날은 모처럼 눈 내린 화이트 크리스마스이었지요. 우리 일행은 레지오 봉사로 좋은 일 하러 나섰다가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해 큰 위험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날 형제님이 운전하는 차가 전복 사고를 내는 바람에 굉장히 속 상하셨죠. 책임감이 강하신 분이니 더 큰 충격으로 받아들이셨을 겁니다. 그래도 그날 주님 은총 덕분에 더 큰 사고 없이 모든 일정을 무사히 끝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한 달 쯤 지난 뒤 그날 일을 되돌아보는 자리에서 우리는 아주 뜻밖에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큰 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일행이 큰 부상당하지 않았던 것이 모두 궁금했었습니다. 그 기적 같은 일이 함께 동승했던 L 형제님께서 새로 구입해서 몸에 지니고 있었던 십자고상 덕분이란 것을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감격했었던가요.


  거기다  P 형제님께서 15 기도 지향을 말씀하신 내용이 제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다. 형제님이 예수고난 15기도를 시작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더 가까이 접하게 도와주시고, 감사기도 드릴 기회를 주십사고 청하셨는데 그 두 가지 기도를 모두 들어 주셨다고 고백하신 내용입니다.

  먼저 성서못자리 봉사자에 임명되어 주님 말씀을 들을 기회를 주셨답니다. 또 이렇게 큰 교통사고에도 불구하고 동승한 분들이 큰 부상 없었고, 그날 일정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두 번씩이나 감사 기도드릴 기회를 마련해 주셨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까지 든다고 말하셨죠.

  저도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형제님의 청원기도를 그렇게 분명하게 들어 주시니 감사하기도 하지만 함부로 청원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메시지처럼 들렸습니다.

  어느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드릴 때 흔히들 주님 ~해주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약속한 것을 모두 보속해야 하니 함부로 청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살아가면서 고난을 겪더라도 그 고난이 다 예전에 청원한 기도의 보속이려니 생각하며 견디라고 하셨습니다. 모두 이번 경우를 두고 하시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며 의문 드는 것이 있습니다. 2 살이 안 된 어린아이의 죽음을 지켜만 보시는 하느님의 심정이 어땠을까? 하는 것입니다. 외아들 예수를 구하기 위해 죄 없는 간난아이들이 죽어간 것이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얼른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실제 인간들은 조그만 이득을 위해 죄 없는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자행되었던 모든 전쟁, 학살, 집단 강간, 학대 등, 특히 아우슈비츠 학살은 어떤 합당한 이유로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저지른 낙태와 배아줄기세포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알량한 자존심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짓밟는 행위에 하느님은 무력한 모습만 보이십니다. 연약한 하느님, 방관하시는 듯한 하느님을 어리석은 제가 이해해보려 한다는 자체가 막막합니다. 그 깊은 신비를 어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신약의 하느님은 스스로 인간의 몸에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신인으로 인류에 합류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힘없고 연약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이 아버지께 버림받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죄 많은 인간들의 어리석은 결정에 내 맡기셨습니다.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폭력에 내 맡기셨습니다.

  교회 역사상 많은 성인 성녀들이 이 신비를 깨달으셨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이 겪으셨던 십자가의 고통을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오상을 받으셨습니다. 소화 테레사는 죽기 전까지 하느님께 버림받는 어둠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오상의 성 비오 신부님도 인간들이 범한 죄의 보속을 원하여 오상을 겪었습니다. 리마의 성녀 로사도 그렇습니다. 성인들의 공통된 지향이 바로 인간의 죄에 스스로 보속하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버림받는 신비를 겪기 원했던 것입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이것을 ‘고통의 통공’이라고 부릅니다. ‘버림받는 체험’이라고 부릅니다. 작고 힘없는 이들 사이에서 육화하시는 주님의 신비를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구약의 하느님은 위력과 분노의 하느님으로 나타납니다만 신약의 하느님은 온유하고 나약하며 사랑이 넘치는 분으로 오셨다고 설명하십니다.


  알아듣기 어렵습니다만, 오늘 복음과 마르티니 추기경님의 글을 읽다보니 형제님과 우리가 체험했던 그날 사고가 문득 연결되어 묵상 되었습니다. 좋은 일에 봉사하러 나셨는데도 왜 나쁜 일이 생겼을까하고 오랫동안 의심했던 제가 두 분의 체험을 듣는 순간, 보이지 않게 끈을 연결하고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깨달은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날 우리가 겪은 사고는 어찌 보면 스쳐지나가는 사소한 일입니다. 또 그렇게 심한 고통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체험을 통해서 평소에 알 수 없었던 은총을 깨달았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라마의 울부짖는 통곡 속에서 같이 아파하고 우시고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깨달으라고 마태오 저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이해되지 않는 고난과 고통이 닥쳐오더라도 주님께서 살아계시고 현존하시는 것에 모든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성인들이 그 신비를 깨달으시고자 그렇게 전 생애를  걸고 싸우셨습니다. 우리도 새겨들어야 하겠지만 너무도 벅차기만 합니다. P형제님, 비록 온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겠지만 함께 기도하며 겸손하게 지혜를 청해보도록 하시죠.


   행복한 연말연시를 주님 은총 안에서 온 가족과 함께 맞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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