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다윈은 1809년 2월 12일 영국의 서부지방인 슈루즈베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명한 내과의사인 로버트 워링 다윈(1766-1848)이고, 어머니는 스잔나 다윈 웨지우드(1765- 1817)이다. 찰스는 2남 4녀 중 다섯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이었다. 찰스의 부계는 의사집안으 로 유명했으며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다윈은 일찍이 진화론을 주창했다. 모계는 지금까지 영국에서 도자기 제조로 유명한 집안이다.찰스는 4살 때 가족과 함께 갔던 곳을 기억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다. 조개껍데기, 광물, 동전, 자갈 등을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고 신기하고 낯선 생물에 호기심이 많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찰스를 가업을 잇게 하려고 에든버러대학 의학부에 입학시켰다. 당시는 마취학이 발달하지 못했을 때여서 찰스는 아파서 부르짖는 환자의 비명소리를 듣고 수술실에서 뛰쳐나왔다. 그의 관심은 여전히 자연과 박물학에 쏠려 있었다.
아버지는 그를 다시 목사를 만들 생각으로 케임브리지대로 보냈다. 다윈은 목사 수업중에도 식물학 교수인 스티븐스 헨슬로우(1796-1861)와 친했고 동식물과 곤충을 모으는 장난을 계속했다. 1831년 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지질학자인 아담 세지위크(1785-1873)와 함께 북부 웨일즈지방의 지질을 조사했다. 또 박물학자를 따라갔다 온 흑인에게 돈을 주고 박제법을 배우기도 했다.
1831년 여름 그의 운명을 바꾼 역사적인 일이 생겼다. 해군성에서 2년 예정으로 남아메리카, 태평양, 동인도제도의 수로를 조사하고, 전세계 여러 곳의 경도를 측정하기 위해 영국전함 비글호에 탑승할 사람을 모집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을 이김으로써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하게된 영국이 세계 각지를 조사하고 연구할 때였다. 영국은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수로 와 해안선을 조사하고, 섬들과 항구도시들의 지리적 위치를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 비글호를 파견했다.
비글호의 선장은 찰스 다윈보다 4살 위인 피츠 로이(1805-1865)였다. 그는 귀족출신으로 성경을 철저하게 신봉했다. 그는 성경에 쓰인 대로 지구가 창조됐다는 것을 실증할 눈에 보이는 증거를 수집할 박물학자가 필요했다. 어쩌면 고통스러운 함장 생활에 대화할 상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함장은 권위의 상징이어서 항상 외로웠다. 실제로 1826년부터 1830년까지 비글호 를 지휘한 프링글 스토크스는 함장의 외로움과 정신적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 또 당시의 관례는 외과의사인 군의관이 박물학자를 겸했으므로 비글호의 공식 박물학자는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로이 함장이 찾는 사람은 공식 박물학자가 아닌 그의 말벗이었던 셈이다.
처음에 연락을 받은 헨슬로우 교수는 자신이 갈 수 없게 되자 다윈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다윈은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런 경험이 목사 수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는 수 없이 그는 항해를 포기하고 사냥이나 하려고 외삼촌집 으로 놀러갔다. 그런데 외삼촌이 후원자로 나서며 그를 도왔다. 외삼촌은 찰스의 아버지에게 다윈을 항해에 참여시켜야 될 이유를 조목조목 적은 권유편지를 썼다. 그것을 읽은 아버지 는 다윈의 비글호 항해를 허락해 주었다.
한편, 로이 함장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비글호를 개조했다. 네문의 대포를 없애 공간을 넓혔고 세번째 돛대를 세워 항해속도를 높혔다. 배 밑바닥에는 구리판과 모전(양탄자)를 대어 방수장치를 보강했으며 피뢰침도 설치했다. 함장은 사비로 준비한 경도측정용 시계를 22개나 실었고, 담당자도 한사람 승선시켰다. 길이 30m, 적재량 2백42t이었던 비글호는 육류 통조림과 건조된 과일을 실어 항해에 필요한 준비를 끝내자 5백t에 이르렀다. 마침내 비글 호는 1831년 12월 27일 영국을 떠났다. 이때 다윈의 나이는 22세였다.
찰스 다윈은 승선과 긴 항해가 처음인지라 멀미를 심하게 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비글호가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항에 기항했을 때 노예제도를 찬성한 함장과 심한 언쟁을 벌여 배에서 내릴 뻔하기도 했다. 항해는 함장의 사과로 계속됐다. 한편 비글호의 공식 박물학자인 외과의사가 리오데자네이로항에서 하선하자, 찰스 다윈이 그 자리를 맡았다.찰스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리오데자네이로부터 비글해협까지 남아메리카의 동부 해안지 방을 탐사한 다음, 마젤란해협을 돌아서 칠레 남부와 중부를 거쳐 안데스산맥을 넘었다. 해안을 따라 페루까지 올라간 그는 태평양으로 나서 갈라파고스제도, 타히티섬, 뉴질랜드, 오 스트레일리아 등 당시 한참 개척되기 시작한 곳들을 차례로 방문했다. 인도양의 킬링군도와 모리서스섬, 남아프리카,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섬과 아센선섬 등을 찾아다니다 보니 비글호의 여정은 점점 길어졌다.
찰스 다윈은 비글호 항해를 마치고 귀국한 후 1838년(29세) 영국지질학회 서기가 됐다. 이듬해에는 영국학사원 회원이 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런 지위에 오르기에는 아직 젊었지만 학자들은 그의 학문적 업적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는 1839년 1월 사촌누나인 엠마 웨지우드 (1808-1896)와 결혼해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아 1841년 2월에 지질학회 서기직을 사임했다. 남아메리카에서 걸렸던 풍토병이 재발한 것이다. 그는 1835년 3월 안데스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를 답사하던 중 침노린재과의 벤추카빈대에 물려 풍토병인 사가스병에 걸린 바 있었다. 브라질 수면병으로 알려진 이 병에 걸리면 어린이는 죽을 수 있으며 성인은 자유로운 행동을 하지 못한다. 지금도 벤추카빈대는 문제가 돼 남미국가들은 대대적인 박멸운동을 벌이고 있다.
찰스 다윈은 1859년(50세) 불후의 명저인 '종의 기원'을 발간했다. 그러나 병 때문에 여행도 하지 못하고 일생을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했다. 다윈은 1882년 4월 19일 73세로 다운에서 타계해 웨스트민스터사원에 안장됐다. 슬하에는 6남 4녀가 있었으나 그 가운데 7명의 자녀만 성장했다. 이 중 3명은 경의 칭호를 받았다. 한편 비글호는 1854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조사하는데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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