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가미가제(神風)와 카이텐(回天) 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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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배봉균 | 작성일2007-01-11 | 조회수483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
가미가제(神風)와 카이텐(回天) 4
여몽연합군(麗夢聯合軍)의 1차 일본침공(日本侵攻)이 예상(豫想)치 못한 태풍(颱風)으로 인하여 실패(失敗)로
끝나자 원세조(元世祖) 쿠빌라이는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훗날을 기약(期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선
(優先) 국내문제(國內問題)인 남송(南宋)의 정벌(征伐)에 전력(全力)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結果) 1279년
2월 6일, 몽골군에 의해 남송(南宋)은 멸망(滅亡)하기에 이릅니다. 쿠빌라이는 미루어 두었던 일본정벌을
남송군(南宋軍)을 활용(活用)하여 전개(展開)하려고 작정합니다. 그리고 1차 침공 때와 마찬가지로 고려(高麗)
에도 똑 같은 규모(規模)의 전함(戰艦)과 군대(軍隊)의 참전(參戰)을 강요(强要)합니다. 그리하여 쿠빌라이는
2차 일본침공에 필요(必要)한 전함 900여 척의 신조(新造)와 군량(軍糧)의 확보(確保)를 고려에게 부담(負擔)
시키는 한편, 충렬왕 6년(1279)에는 동정(東征)의 전담기구(專擔機構)를 합포(合浦, 오늘날의 마산)에 개설
(開設)하니 이것이 바로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입니다. 충렬왕 7년(1281) 5월 마침내 여몽연합군은
합포를 떠나 2차 동정(東征)의 길에 올랐습니다. 이때의 진용(陳容)을 살펴보면 1차 침공 때와 마찬가지로
몽골군의 장수는 흔도, 홍다구였고 고려군 장수는 김방경이었습니다. 동로군(東路軍)이라 이름지어진 여몽연합
군은 4만명의 규모(規模)이고, 송장(宋將, 남송의 장군) 범문호(范文虎)가 이끄는 강남군(江南軍)은 10만명으로
실로 방대(尨大)한 규모의 병력(兵力)이었습니다. 5월 3일 합포를 떠난 동로군(東路軍)은 1차 원정(遠征) 때와
같이 대마도와 이키시마(壹岐島)를 초토화(焦土化) 시킨후 북규슈(北九州) 해안(海岸)에 도착(到着)하여 공격
(攻擊)을 개시(開始)하였으며, 6월 18일에는 뒤늦게 중국 해안에서 출항한 강남군(江南軍)이 합세하여 더욱
적극적(積極的)으로 일본군(日本軍)을 밀어붙여 멸망(滅亡) 일보직전(一步直前)까지 몰고 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뜻하지 않은 천재(天災)의 변(變)이 일어났습니다. 즉 윤(閏) 7월 1일에 북규슈 일대를 갑자기
휘몰아친 태풍으로 인하여 동로군(東路軍)은 막대(莫大)한 손실(損失)을 입고 다시 합포로 되돌아오고 말았습
니다. 고려의 전함이 튼튼해서 일부(一部)만 파손(破損)되어 남은 병력이 돌아올 수 있었지만, 튼튼치 못한
강남군(江南軍)의 3,500여척 전함(戰艦)은 10만여 명의 병력(兵力)과 함께 북규슈(北九州) 앞 바다에
수장(水葬)되고 말았습니다. [高麗史]에는 이 때의 상황(狀況)을 "6월 임신(壬申, 6일)에 김방경 등이 왜군
(倭軍)과 싸워 적군 300여 급을 참수(斬首)하였다. 범문호가 전함 3,500척과 만군(蠻軍) 십여 만을 거느리고
와서 합전(合戰)하였으나 마침 태풍이 일어 만군은 모두 익사(溺死)하였다."라고 기록(記錄)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젼 다큐멘타리 필름과 인터넷 상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가미가제(神風)와 카이텐(回天) 5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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