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산(孤山)과 다산(茶山) 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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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배봉균 | 작성일2007-01-19 | 조회수452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
고산(孤山)과 다산(茶山) 4
다산(茶山)이 서른두 살 되던 해인 1794년에 연천 현감(縣監)인 서용보(徐龍輔)가 농민(農民)들을 수탈
(收奪)하는 등 횡포(橫暴)가 심하다는 소문(所聞)이 조정(朝廷)에 까지 들려 왔습니다. 정조는 다산을
경기도(京畿道)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任命)하여 비리(非理)를 조사(調査), 척결(剔抉)하도록
하였습니다. 순찰(巡察)을 마치고 돌아온 다산은 서용보의 협잡 사실(挾雜 事實)을 있는 그대로 보고(報
告)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봉고파직(封庫罷職)되고 벌을 받은 서용보는 두고두고 다산을 미워하
고, 사사건건(事事件件) 트집을 잡게 됩니다. 1797년 벼슬이 승지(承旨)에 까지 오른 다산은 모함(謀陷)
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辭意)를 표하고 물러났습니다. 곧 지방관(地方官)인 황해도(黃海
道)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임명되어 흉흉(兇兇)한 민심(民心)을 가라앉히고 선정(善政)을 베풀었습니
다. 다산은 곡산에서 지방행정(地方行政)을 쇄신(刷新)하고 창궐(猖獗)하던 불치(不治)의 전염병(傳染
病) 두창(痘瘡, 마마)을 예방치료(豫防治療)하였습니다. 다산은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백성을 위한 농업
기술(農業技術)은 물론 그 당시로서는 첨단과학 의술(尖端科學 醫術)인 종두법(種痘法)을 연구(硏究)하
고 시술 접종(施術 接種)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곡산부사 시절(時節)이 선정(善政)이 훗날 다산을
사형(死刑)에서 유배(流配)로 감형(減刑)을 받게 하는 요인(要因)이 되기도 합니다. 1799년 정조는 다산
에게 병조참의(兵曹參議)의 벼슬을 주어 측근(側近)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고(自古)로 배가
고픈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배가 아픈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라 했듯이, 다산에 대한 반대파(反
對派)들의 모략(謀略)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때 조화진이라는 자가 “이가환, 정약용 등이 서학(西學)
을 받들면서 역적(逆賊)을 모의(謀議)한다.“는 상소(上訴)를 올렸습니다. 다산은 더 이상 반대파의 모략
을 견디기 어려워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마재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당호(堂號)를 여유당(與猶
堂)이라고 지었는데 이것은 조심조심 세상을 살아가자는 뜻입니다. 1801년(순조 1년) 그를 아끼던 정조
가 세상을 떠나자 공서파(功西派)는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켜 서학을 받아들였다는 구실로 남인들
을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다산도 이가환과 함께 투옥되고 말았습니다. 대부분의 조정대신(朝廷
大臣)들은 다산만이라도 석방(釋放)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서용보가 끝내 반대(反對)하여 결국 다산
은 경상도 장기로 귀양을 갑니 다. 셋째형 약종과 이가환은 옥중에서 맞아 죽었고, 둘째형 약전은 전라
도 신지도로 유형(流刑)되었습니다. 그 후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가 발각(發覺)되자(황사영은 다산
의 조카사위 임)반대파는 이 기회(機會)에 다산을 잡아 죽이고자 합니다. 그 때 마침 황해도에서 지방관
의 임기(任期)를 마치고 돌아온 정일환이 다산이 과거(過去) 지방관으로 있을 때 쌓은 공적(功績)을
들어 변호(辯護)함으로써 죽음만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다산은 강진(康津)으로, 둘째형
약전은 흑산도(黑山島)로 유배지(流配地)를 옮기게 되는데 결국 형 정약전(丁若銓)은 유배 중에
사망(死亡)하고 말았습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와 네이버 오픈백과사전을 참조, 발췌하여 작성했습니다.)
고산(孤山)과 다산(茶山) 5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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