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孤山)과 다산(茶山) 5
小山蔽大山(소산폐대산) :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려 보이지 않는데,
遠近地不同(원근지부동) : 멀고 가까운 땅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일곱 살 때 지었다는 시(詩)입니다. 가까이 있는 작은 산(山) 때문에 멀리
있는 큰 산(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그가 작은 산(山) 뒤에 있는 큰 산(山)을 보고 있다는
뜻이며, 그것은 내면화(內面化)된 정신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可能)한 일입니다. 이 두 줄의
짧은 시(詩)에서 어린 다산(茶山)의 번득이는 직관력(直觀力)과 천재성(天才性)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산(茶山)이 유배(流配)된 전라남도 강진에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後孫)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산이 유배 중 거처(居處)인 다산초당(茶山草堂)은 원래(原來)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에 살던 해남(海南) 윤(尹)씨 집안의 귤림처사(橘林處士) 윤단이 지은 산정(山亭)이었습니다.
다산의 어머니는 조선시대 (朝鮮時代) 3재(三才)의 한사람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孫女)
이고, 윤두서는 다시 고산(孤山)의 증손(曾孫)이니, 귤동마을의 해남 윤씨는 다산(茶山)에게는 외가
(外家)쪽으로 친적(親戚)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因緣)으로 윤단은 다산을 만덕산(萬德山) 기슭의
초당(草堂)에 모셔다 자신(自身)의 장남(長男) 윤문거(尹文擧)를 비롯한 삼형제(三兄弟)에게 학문을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그 소문(所聞)이 퍼져 나중에는 18명이나 되는 제자(弟子)들이 다산초당으로
모여들어 배움을 청하였습니다. 다산은 제자들을 가르치며 또한 자신의 학문을 닦고 저술활동(著述活
動)을 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차를 즐겨 마시며 다산초당 옆에는 연못을 만들고, 나무 홈을
파서 계곡(溪谷) 물을 끌어들여 그 못으로 폭포수(瀑布水)가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만덕산
앞으로 흐르는 탐진강에서 돌을 주워서 연못 가운데 탑(塔)처럼 쌓았으며, 못 주변(周邊)에는 백일홍
(百日紅)과 대나무를 심어 운치(韻致)를 더하게 하였습니다. 그 탑(塔)을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다산은 18년 동안 다산초당에서 유배생활(流配生活)을 하다가 1818년 유배가 풀려
고향(故鄕)에 돌아와 저술활동(著述活動)을 하다가 1836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강진 유
배생활 18년과 고향에서의 18년간 저술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산은 수많은 저서(著書)를 남겼습니다.
대표저서(代表著書)로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500 여권이
있습니다.
(경향신문 2004년 9월 30일자 소설가 엄광용씨의 ‘유배지 기행’을 참조, 발췌하여 작성했습니다.)
고산(孤山)과 茶山 6로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