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수도승(修道僧)이자 선교사(宣敎師)-----2007.1.25 목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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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07-01-25 | 조회수611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님 강론 말씀)
사도22,3-16 마르16,15-18
수도승(修道僧)이자 선교사(宣敎師)
2009년이면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 한국 진출 100주년이 됩니다. 하여 우리 공동체는 지금 100주년을 앞두고 9시경 후에 공동기도를 바치고 있으며 다음 대목은 기도문 중 마지막 부분입니다.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항구히 수행하게 하소서.”
여기서 주목할 바는 수도승과 선교사라는 명칭의 문제입니다. 비단 수도승뿐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본질적 문제입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복음 선포의 선교 사명은 교회의, 믿는 우리 모두의 본질적 사명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우리 삶에 덧붙여진 부수적인 그 뭐가 아니라 우리 삶 자체가 선교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존재의 양 측면입니다.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입니다. 뒤로는 수도승, 앞으로는 선교사입니다.
이래서 수도원의 뒷문은 사막에 앞문은 세상에 열려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안으로는 관상가, 밖으로는 활동가라는 이야기입니다.
관상과 활동, 기도와 일이 분리할 수 없듯이 수도승과 선교사 역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수도승의 복음적 삶 자체보다 더 좋은 선교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선순위는 분명합니다. 기도에 일이고 관상에 활동처럼, 수도승에 선교사입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관상적 일치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선교활동이 자연스런 순리입니다.
향기 좋은 꽃에 저절로 벌 나비들 모여들 듯, 관상체험의 향기에, 매력에 끌려 수없이 찾아드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만난 바오로와 주님과의 감동적인 문답 내용입니다.
기고만장, 잘못 된 열정으로 교만이 하늘을 찌를듯하던 바오로, 주님을 만남으로 비로소 제정신을 찾아 겸손해 졌습니다.
주님과의 이 감동적인 만남의 체험이 바오로를 회심시켰고, 바오로의 선교활동에 마르지 않는 샘이 됐을 것입니다.
내적 충만해 있어야 선교사의 삶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환히 반사하는 수도승의, 관상가의 삶 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의 선교도 없습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시고 당신의 선교사로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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