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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불도저 신부' 를 위하여 . . . . . [임문철 신부님]
작성자김혜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7-02-05 조회수817 추천수12 반대(0) 신고

 

 

 

 

 

제주교구 사제단 화이팅!

 

[오리 떼가 모여 놀고 있는데, 혼자 떨어져 있는 오리는 병든 놈이다]

 

국민(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철부지 소신학교 시절,

사감선생님으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이다.

 

(?)들었다는 판정을 받으면,

다음날 새벽, 아침도 못 먹고 보따리를 들고 쫓겨나야 하는 판이라,

병든 오리가 되지 않기 위하여,

성당으로,

교실로,

운동장으로,

뒷산으로 잘도 떼지어 다녔다.

 

그러다가.....

외토리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일 수도 있다는 기특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그 때가 사춘기였을까?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쇄신이란 세찬 물결을 접하면서

기성 세대를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라 단정짓고,

혼자 선구자요, 개혁가인양,

대한민국의 구원은 혼자 도맡은 것처럼 으스대기도 하였다.

돌이켜보면 웃음이 나는 옛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런 치기(稚氣)속에서도 방학생활을 마치고 귀교하는 날

저녁식사 시간, 동료 신학생들과 그 동안의 안부를 묻고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들뜬 소란함 속에서,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한데 모여 사는것'

 (시편 13)이라는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지는 삶이었다.

 

가끔은 약을 올려주기도 하고,

때로는 치고 받기도 하면서,

어떤 때에는 장난치다 들켜 두 손을 든채

슬리퍼를 입에 물고 침을 흘리며 벌을 서기도 했고,

침묵을 깨뜨렸다고

추운 겨울날 팬티만 입고 운동장을 돌며 단체기합을 받던...

 

친구들이 제각기 자기 교구로 흩어졌다.

나는 나대로 제주교구에서의 새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설레임과 두려움이 교차되는 가운데 시작된 첫 사목생활.

 

사제수가 모자란 까닭에

고추보다 더 맵다는 보좌 시집살이를 겪어 볼 겨를도 없이 

이 공소, 저 공소로

돌투성이의 산길을 지프차로 잘도 돌아다녔다.

 

교우들과 음식을 나눌 때면 상석에 앉는 것이 어색했고,

할아버지를 제쳐 두고 먼저 권하는 술잔을 받는 것이 황송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영성체 때,

나만 큰 떡을 먹고 나만 포도주를 마시기가 미안했던 그 시절도,

캐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 보다 더 어렵다는 전복을 보면

 

'하느님이 신부님 갖다 드리라고 내 눈에 띄게 해 주셨구나...'

 

했다는 해녀 교우들과의 삶도 불과 2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유아원 설립을 위해 강당 보수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대도시의 선배 신부님들을 찾아 다니다 본당에 돌아와 보니,

새 신부가 본당신부로 발령된다는 청천벽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나는?"

 

"광양(光陽)이래요."

 

이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빛과 별,

그러나 교구에서 두 번째로 큰 본당이 아닌가!

 

"아이고 하느님!

 햇 병아리가 그렇게 큰 본당을 어떵허랜 햄쑤광(어떡하란 말씀입니까)?

 알앙 헙써(알아서 하십시오)!"

 

정말로 주님이 알아서 해 주셨다.

몇 안 되던 평일 미사 참석자들이 부쩍 늘었고,

스무 명 안팎이던 예비자 교리반은 1백여 명씩 몰려와 교실이 모자라고

마이크를 사용해야 할 만큼 변했다.

 

교우들은 나를 [불도저 신부]라 불평(?)하면서도

활력에 가득 넘쳐서 점점 붐비는 주일미사에 좌석 정리하기 바빴고,

나는 나대로 부임초 ㅇㅇ만 원이던 주일 헌금이 한 주일마다

몇 만원씩 오르는 것을 보고 신바람이 났다.

 

그러나,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까맣게 잊고...

나는 능력있고 열심히 뛰는 젊은 신부라는 사탄의 속삭임에 솔깃해져...

 

동료 사제들을 은연중 평가하고 비판하며 잘난 척,

그래서 백조가 아니라 진짜 병든 오리가 되어 버렸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런 나를 어느 선배 신부님들이 마냥 귀엽다고 봐주겠는가.

겉으로 아무리 공손한 척 해봐야 마찬가지이리라.

 

하느님께서 이런 나를 위해서 이미 기막힌 작품을 기획하셨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나는 성당이 비좁으니 새 성당을 짓자는 교우들의 요청을

주제넘게 냉큼 받아들였다.

 

구태어 돈 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교우들은 기쁨에 넘쳐

집과 밭을 팔아 내놓을 테고...

그래서 아담하고 멋진 새 성당을 짓고도 돈이 남아서

그 돈을 어떻게 쓸까 고민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왠걸,

그게 하느님이 던진 미끼요 그 분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처음엔 좋았다.

결혼 패물을 손수건에 싸들고 오는 부부들,

돌반지 가져오고 새뱃돈 모아 오는 아이들,

밀감 따서 일당 모아 오는 할머니들,

심형래 닮은 얼굴이지만, 못 먹어 부은 걸로 봐 달라는 말에

반지를 빼주고 땅을 내놓던 서울 교우들.

 

그러나 시공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은 절대로 안 된다는

비토 그룹이 있어 기공식부터 공기가 흐려지더니...

노사 분규의 여파,

천정부지의 물가,

시공자는 마음이 상해서 계속하니, 못하니 하여 공사는 점점 늦어졌다.

교우들의 불평소리도 따라 높아졌다.

 

공사비를 결산하려니 물가 상승 부분에서 너무 차이가 났다.

사목회측에서는 2 ~ 3천만 원만 더 주면 되리라 계산했는데,

7천만 원이 더 들었다는 시공자의 주장이다.

 

한쪽에서는 계약대로 해야 될 것 아니냐,

시공자는 성당 짓는데 든 돈은 줘야 할것 아니냐 하고...

사제관에 모인 임원들은 얼굴 펼 날이 없었다.

교우들도 내놓고 말은 못했지만 걱정과 불만에 가득차 있었고,

축성식은 자동으로 무기한 연기되었다.

 

예물을 바치기 전에 형제와 화해하라는 말씀이 버젓한데,

시공자와 그 모양으로 어떻게 성당을 봉헌하겠는가!

 

남들은 돈이 모자라 고생을 한다던데

나는 이 무슨 헛고생이람.

교우들에게 미안하고 걱정하는 웃어른들 보기가 민망했다.

 

구원의 손길을 기대하지도 않았던 곳에서 왔다.

선배 신부님들이 키신저처럼 왕복외교를 펼치고

 

'차액이 얼마냐? 내가 책임질게!" 하는 신부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너를 위해 미사를 봉헌했다."고 격려 전화를 하는 신부님도 있었다.

 

결국 주교님의 지원과 격려로

본당도 살고,

시공자도 살고,

덩달아 나도 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헌당 미사에서

사제단에 대한 감사를 정중히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제단의 격려와 지원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기쁨과 영광은 없었을 것이라고...

 

이제야 나는 잊었던 노래를 다시 흥얼거린다.

 

♬♪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한데 모여 사는 것...

 

 

 

 

- [치마입은 남자의 행복]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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