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예기치 않은 참사들을 겪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불의의 사고로 희생된 많은 사람들의 처지를 함께 아파하고, 참사가 빚어진 것에 대해 경악합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가 되어버린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미국의 9·11테러 등이 그렇습니다. 그때마다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 바로 오늘의 복음입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13,2) 예기치 않은 참사를 당한 사람들이 남아 있는 우리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고하게 피해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원인을 바로 알고 시정하지 않으면 비극은 계속됩니다. 사람의 생명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인식하며 책임있게 공사를 하는 것, 삶을 비관하지 않도록 서로 보살펴 주는 사회를 만드는 것, 국가간에도 약육강식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통치 질서를 마련하는 것이 비극의 원인을 없애는 것입니다.
이는 이상적 사회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각자가 이런 삶의 비전을 가지지 않는다면 미래는 참담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종류의 참사가 악순환되고, 그 피해자는 점점 더 가까운 내 이웃으로, 그리고 내게도 닥칠 것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13,5). 그래서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사람들의 봉변 보고를 듣고서 먼저 “자,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하지 않으시고 아직 살아 있는 우리가 그 사건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43-44ㄱ). 그런데 오늘 복음의 무화과나무는 아예 열매를 맺지도 못합니다. 주인은 드디어 결단을 내립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13,7) 단호하십니다.
세례자 요한도 회개를 위한 세례운동을 하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속에 던져진다”(루카 3,9)라며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보일 것을 촉구합니다. “나는 포도나무다”(요한 15,5)라고 하신 예수께서도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고 열매를 내지 못하는 가지는 잘려 불속에 던져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급하고 단호한 요구에 대해 예수께서는 한 해만 더 여유를 주도록 포도원 주인에게 간청하십니다. 그동안 둘레를 파고 거름을 줘서 가꾸어 보겠다고,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른다고. 끝까지 가능성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으시는 의지를 봅니다. 그분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이사 42,3) 분입니다.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추수 때까지 그냥 두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고 햇빛을 비추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유예의 시간을 주는 이유를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2베드 3,15). 시편은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신다”(103,8)고 고백합니다. 사실 그분이 너그러우신 것은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 끝이 있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버리십시오”(13,9). 잘라버리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지만 그 유예 기간이 무한정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언제 ‘그 갈릴래아 사람’이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자비의 하느님이심을 믿지만 동시에 정의의 하느님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의가 없는 자비는 무례하게 만들고, 자비가 없는 정의는 폭력적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공정으로 드높으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정의로 거룩하심을 드러내리라”(이사 5,16).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봅니다. 살아 있는 동안 온갖 복을 다 누린 부자는 대문 앞의 거지 라자로에게 무관심했습니다. 그가 죽어 불속에서 극심한 고통에 울부짖으며 라자로의 도움을 청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회개의 시간은 이미 끝이 났습니다. 유예기간은 살아 있을 동안입니다. 부자는 라자로를 자기 형제의 집으로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자기와 같은 처지가 되지 않도록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거절당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율법과 예언서가 있고, 게다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의 말씀도 있으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서 못한다는 변명은 소용없습니다.
법률 용어에서 집행유예란 유죄 판결을 내리고서 일정 기간 동안 형의 집행을 보류하며, 그 기간을 무사히 넘기면 선고의 효력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당장 잘라버리라고 판결이 났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지기 예수님은 한 해의 유예기간을 청했습니다. 그동안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어 다시 돌볼 작정으로. 아니 당신 몸소 죽음으로 거름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집행유예 기간이 지나기 전에 그 거름을 먹고 사랑의 열매를 맺어 선고의 효력이 없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이사 5,4ㄱ)라고 탄식하게 해드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