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때는 밤이었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03 조회수1,485 추천수4 반대(0) 신고

 

 

<때는 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때는 밤이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요한 13,21-33. 36-38)



  복음서의 진실성은 그 내용이 예수의 권위를 위협할 만한 내용도 서슴지 않고 기술했다는데 있습니다. 예수의 직제자인 유다 이스카리옷 마저 예수를 배반했다는 점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스캔들이 되는 사건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돈 몇 푼에 스승을 팔아넘기는 제자를 처음부터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로 언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전능하신 하느님은 여전히 악을 허용하시고, 인간이 유혹에 빠지게 나두시고 계신지하는 물음과 왜 예수께서는 유다 이스카리옷와 같은 인물을 제자로 받아 들이셨는지 하는 물음은 똑 같은 내용인 것입니다.


  “때는 밤이었다.”는 시적 표현만이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이성적이지 못한(irrational) 진리를 엿보게 만들어 줍니다. 신앙이 이성적이라면 신앙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고에 언제나 합당하다면 굳이 믿음으로 이끌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은 불합리(不合理)가 아닌 非-합리적인 측면을 본래 지니고 있다는 루돌프 옷토(聖스러움의 意味. 저자)의 지적대로 신앙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그 무엇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이성을 유보할 줄 알 때 신비를 엿보는 눈이 생길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과 함께 산 3년간 공생활 기간 뒤에도 유다가 완전히 개심을 하지 못했다면 악의 근원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의 우리조차 그것을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그 악의 뿌리는 자신의 뜻을 관철해 보려는 욕심이었습니다. 유다의 생각에는 그 길이 예수님을 돕는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라는 스승의 말씀이 오히려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그는 회계를 맡아 볼 만큼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습니다. 스승 예수께서도 못하는 일을 자기가 앞장서서 이룩해보려 하였습니다. 그는 그 결과가 스승 예수를 떠나게 되고, 스승과 단절하는 길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결국은 홀로 서야 한다는 외곬의 생각에 빠졌습니다. 모든 책임은 스스로 지는 것이니 마음먹은 일을 저질러 보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은 혼자 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혼자 태어나고 죽을 때도 결국은 혼자서 죽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굽이굽이 인생길에 진정한 친구도 없으며 영원한 원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철저한 고독만 있다고 여깁니다. 그것이 이성적인 생각이라고 많은 철학자나 종교인들이 외칩니다. 많은 사람들도 그런 인생관을 지니고 삽니다. 인생은 언제나 심은 대로 거두며, 자기의 행동에 달렸으니 오직 믿을 것은 자신의 능력뿐이라고 말합니다. 유다도 이런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수제자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그는 크나큰 사랑을 받은 만큼 되갚아 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의 사랑도 결국은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생각도 사실은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나온 결과 일뿐입니다. 진정한 이해를 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볼 때 그도 부족하고 나약한 신앙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유다에게 부족한 신앙은 인간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데서 왔습니다. 자신 안에 함께 거처하시겠다는 성령의 협조자를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현재 우리 교우들도 예수님께서 언제나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뼈 속까지 인식하고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앙생활 따로 인간적인 사회생활 따로 인 채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적지 않은 교우들이 성당 생활마저 뭇 사회생활처럼 서로 미워하고 악다구니하며 삽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는다면 두려워서라도 그렇게까지 행동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베드로도 사랑의 시작이 하느님께로부터 비롯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어 주님을 떠나더라도 용서하시고 다시 받아 주신다는 체험을 하기 전에는 그 사랑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몸으로 죽였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죽였습니다. 두 제자 모두 공통적으로 스승 예수를 배반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와 베드로는 마지막에 가서는 서로 상반된 길을 가게 됩니다. 유다는 최후까지 자신만의 길을 가려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단절한 채 죽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길로 돌아섰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주님께 용서를 받아 회개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겐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함께 길을 동행해 주십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자만이 주님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참된 신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