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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평화가 너희와 함께 - 용서하여라.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15 조회수770 추천수3 반대(0) 신고

 

 

<평화가 너희와 함께!>   - 용서하여라.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19-3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언제나 먼저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그저 의례적인 인사말이라고 하기엔 부족합니다. 어느 시인은 “인류라는 종족은 고통에만 흥미를 끄는 심술궂은 종족이다.” 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 지독한 불행을 겪었다고 여겨지는 예수께서 오히려 평화를 말합니다. 그 지독한 불행을 겪어낸 분이 평화를 말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평화는 ‘샬롬’으로 그 의미가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는 많이 색다릅니다. 샬롬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머무름으로써 얻어지는 은총을 뜻합니다. 올바른 관계란 계약을 맺은 쌍방이 계약조건을 충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충실히 따를 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대로 자손을 별처럼 많게 하시고 온 땅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영적인 풍요와 함께 실제적인 풍요도 주십니다. 물질적 부유와 삶의 행복을 주십니다. 명예와 번영과 행운, 전쟁에서는 승리도 주십니다. 사회 정의를 이룩해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평화는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숨을 내쉬며 제자들에게 불어넣어준 성령, 그것은 사랑이며 생명의 에너지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코에 불어넣으신 영처럼 생명의 기운입니다.


  그 샬롬의 인사를 통해 우리는 마음이 흔들리는 나약함, 불안, 실패의 두려움, 교만, 욕심, 무지, 방종 등의 악으로부터 벗어나 주님과 같은 마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샬롬의 인사는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성령강림 사건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때에 바로 일어납니다. 유령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생전의 예수와 동일하신 분이 육신을 지닌 채 나타나시어 성령의 세례로 평화를 축복해 주시고 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에게 권능과 지혜의 성령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은 불과 혀의 형상으로 바람처럼 나타납니다. 바람은 그 행선지를 알 수 없는 성령의 신비스런 움직임을 상징합니다. 불은 에너지를 분출하는 능력과 정화를 상징합니다. 혀는 언어를 뜻합니다. 바벨탑 사건에서 언어가 뒤섞여 서로 갈라지는 비극을 맞았다면 이제 주님의 성령 강림으로 비로소 소통되고 통합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탈출기 3,2절에서 모세가 체험한 불타는 떨기나무는 성령의 불이 어떤 것인지 보여줍니다. 가시떨기가 불타지만 태워 없애버리지 않는 신비의 불꽃입니다. 한 번에 확하고 일어 모든 것을 태워 없애 재로 만드는 불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며 비추는 불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백성이 뜨거운 열정으로 출애굽의 대업을 완성하면서도 40년간의 지루하고 땡볕이 내리쬐는 광야를 견디게 만든 “차가운 불”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성령의 불도 이 “차가운 불”입니다. 뜨겁고도 냉정한 불이기에 인류 역사와 함께 꺼지지 않고 계속 불탔습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가신 예수께서 똑같이 제자들을 파견합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그 첫 메시지는 용서입니다. 사도행전이나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점이 요한복음서의 특징입니다. 싸워서 이기는 정복주의자적인 복음 선포가 아니라 서로 용서하라는 사명입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요한복음을 교회의 원로들을 위한 영적인 책이라고 정의합니다. 원로라면 교회에서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남들에게 존경받기 좋아하고, 가르치려들고, 거들먹거리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또 체면을 중시하여 작은 일에 소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상선벌악의 정의를 지나치게 내세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정의를 주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목이 뻣뻣하다고 표현합니다. 꼬장꼬장하다고, 노인네 같다고 싫어합니다. 그들은 돌같이 굳은 마음뿐이어서 남을 용서하고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런 연유로 용서를 우선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21장에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예수께서 복음 선포를 말하지 않으시고 세 번씩이나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고 요구하신 것도 다 이런 맥락입니다.


  20장 24-29절에서 토마스로 대표되는 미래의 사도들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교회의 지도자 위치에 있다고 해서 모두 영성이 깊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토마스처럼 이성적이기 때문에 의심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를 미리 염려한 까닭에 복음서 저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복음의 유일한 계명은 서로 용서할 때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용서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평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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