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다채로운 주제들이 한데 어울려 있습니다. 평화·파견·성령·용서 그리고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다.”(20,19) 제자들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도 마음도 꼭 닫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빛이신 주님께서는 오시어 그들 어둠의 한가운데 서십니다. 부활하신 그분에게는 아무런 장벽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가 너희와 함께!’란 첫 메시지를 두 번이나 선사하십니다. 제자들은 몹시 기뻐합니다. 평화와 기쁨은 부활하신 주님이 현존하시는 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신이 하셨던 사명을 전수하십니다. 사명의 내용은 죄의 용서를 얻기 위한 회개와 세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님이 무고하게 처형당하신 비통한 사실과 3년 동안 우쭐대며 제자로서 따라다녔던 자신들이 스승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수치, 자신들에게도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미래에 대한 어둠 등 감정의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이 사명을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용서하지도 못하고 또 용서받지도 못한다고 느끼는 한 평화를 얻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사실 가장 분노해야 하고 용서하기 힘든 상황에 있었던 분은 예수님이셨지요. 그러나 그분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시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셨고, 십자가 위에서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무지와 비겁한 행동을 용서한다는 직접적인 말씀을 하시지 않았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성령의 열매이기도 하기에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며 “성령을 받아라.”고 하십니다. 모든 만물과 인간을 지어내신 하느님 창조의 숨결이 새롭게 주어집니다. 이 힘으로 제자들은 재창조되고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체험한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온 세상에 선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0,25ㄴ) 토마스에게 예수님 부활의 증거는 직접 보는 것, 손을 넣어보는 확인입니다. 그는 예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러 가시려 할 때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11,16ㄴ)라고 한 사람입니다. 죽음은 알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생명이 죽음을 이긴다는 사실은 알아듣지 못한 사람으로서, 또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지고 싶은 갈망을 가진 우리의 대변인입니다.
여드레 뒤, 주간 첫날에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십니다. 첫날은 부활하신 주님의 날로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그분의 현존은 이제 우리와 함께 어디서나 계시기에 우리의 날들은 늘 주간 첫날로서 그분 현존을 보는 나날이어야 합니다. 토마스가 예수님을 뵙게 된 것은 다른 동료들과 자리를 함께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는 다른 사도들이 주님을 뵈었다고 하자 그 말을 믿지 못하면서도 공동체와 함께했습니다. 베드로처럼 사랑은 있지만 둔감한 사람에게도, 토마스처럼 실질적이고 회의적인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예수님은 토마스에게도 ‘평화’를 주십니다. 상처 자국을 확인하게 해주십니다. 그는 공동체의 체험을 믿지 않았지만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습니다.
한편으로 이 의심은 자신도 직접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의 표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의심을 지닌 한 평화는 없고 사명 수행 또한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갈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분은 우리 각자에게 맞는 방법과 때에 당신의 현존을 깨닫게 해주시고 당신 사명을 전할 수 있게 해주실 것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복음은 이 신앙고백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그분이 바로 하느님과 같은 분임을 토마스의 입을 통해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토마스에게, 아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토마스의 경험을 통해 이제 우리의 신앙은 감각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했습니다.
토마스가 부활하신 주님을 인정한 증거는 못자국, 곧 상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눈을 돌려 사랑받지 못한 그분의 상처를 이웃 안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사랑의 상처도 보아야 합니다. 그분은 당신 상처로 우리 상처를 낫게 해주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상처 또한 다른 이의 상처를 낫게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나그네로, 헐벗은 사람으로, 목마른 사람으로, 감옥에 갇힌 사람으로, 우리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그분의 상처를 보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용서로써, 때로는 나의 것을 나눔으로써 새롭게 되고 삶의 힘을 찾게 하는 것이 바로 그분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사명입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