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장은 나중에 첨가된 부분으로, 그림같이 펼쳐지는 세 가지 이야기를 통해 일상 안에서 체험할 수 있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보여줍니다. 티베리아스 호수에서 엄청나게 많이 잡힌 물고기 기적, 호숫가에서 아침식사, 목자로서 베드로의 직무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명에 들어맞지 않게 활동하는 그리스도 신자 공동체는 늘상 시험에 들고 결실이 없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순간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됨을 봅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선교의 파견은 예수님과 친교가 이루어지는 성찬에서 시작하고 끝남을 가르쳐 줍니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를 섬기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참된 목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네.” 베드로와 몇몇 제자들은 스스로 무엇을 하긴 해야 하지만 무엇을 할지 몰라 익숙한 일상으로 되돌아갑니다. 갈릴래아는 그들의 일상생활이 영위된 곳, 또한 예수님과 추억이 서린 곳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일상에서 함께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밤새 애썼지만 허탕만 치고 돌아옵니다. 주님 없이 하는 일의 헛됨을 봅니다. “주께서 집을 지어주시지 않으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도성을 지켜주시지 않으면 그 지키는 이의 파수가 헛되리라.”(시편 127,1)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21,6ㄱ) 익숙한 목소리입니다. 3년 전,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그 상황입니다만 이제는 그때처럼 깊은 곳까지 저어가지 않아도 됩니다. 스승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뼈아픈 체험으로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백쉰세 마리, 온갖 종류의 물고기가 잡혔습니다만 그물은 터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마치 교회의 미래를 보는 듯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들을 통해 모인 모든 계층 사람들과 민족들이 주님이란 그물 안에서 하나의 유대를 이루는 모습 같습니다. “주님이십니다.” 사랑받던 제자가 또 먼저 알아봅니다.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지만 그것을 빨리 깨닫는 것은 역시 사랑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듭니다. 처음 부르심받았을 때 그는 엄청난 체험 앞에 두려워 떨며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주님을 배반한 죄인이지만 두려워하지도, 떠나가지도 않습니다. 더 빨리 만나고 싶었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21,13) 세 이야기 중간에 아침식사가 있습니다. 선교의 사명도 목자의 임무도 모두 주님의 식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안에서 수렴되고, 그 안에서 힘을 받습니다. 오늘은 빵과 포도주가 아니고, 빵과 물고기입니다. 그리스 말로 물고기는 ICHTHUS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원자’의 첫 글자를 모아서 만든 것으로, 초대교회 박해 때는 물고기 그림이 그리스도 신자들을 표시하는 암호였습니다.
또한 물고기는 고대 사람들에게 불멸의 양식을 뜻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물고기를 가지고 계셨지만 그들이 수고로 잡은 고기를 보태십니다. 그분은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자로서 불멸의 양식을 나눠주십니다. 친밀감과 사랑을 느끼게 하는 아침식사 장면입니다. 누구도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분이 주님이시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숯불’이 있었습니다. 이는 특히 베드로와 함께 기억되는 불입니다. 그의 열정은 불 같았지요.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사제의 종의 귀를 칼로 잘랐습니다. 그러나 열정은 어디 가고 예수께서 대사제의 심문을 받는 저택 뜰에 놓인 숯불, 거기 서서 불을 쬐다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아픈 일을 상기시켜 주는 숯불입니다. 이제 그 숯불은 활활 타올랐다가 금방 사그라드는 그런 불이 아니라 흰 재가 되기까지 타는 불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께서는 세 번씩이나 물으십니다. 마치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그 사실을 보상이라도 하시는 것처럼. 그 보상은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배반한 베드로의 아픈 상처를 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는 “예, 사랑합니다.”라고 하지 않고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듯 그렇게 쉽게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수난을 통해 뼈저리게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대답을 인정하십니다. 나약함으로 넘어질지언정 그 마음의 밑바닥에 들어 있는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아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목자가 해야 할 임무입니다. 그것도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여야 합니다. “네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메어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나를 따라라.” 부르심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실패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그 부르심을 완성합니다. 그는 결국 양들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함으로써 예수님을 닮은 제자가 되었습니다. 일상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감지하지 못하고 매순간 놓쳐버리는 나 역시 부르심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실패를 거듭할 것입니다만 그분의 사랑에 희망을 둡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