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지친 다리를 끌고 어느 절에 들어가니 대웅전 마룻바닥을 치며 울고 있는 사람과 웃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궁금해서 안내자에게 질문을 했더니 함께 간 보좌 신부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수녀님, 딱 보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울고 있는 것을 보면 무언가 슬픈 사정이 있는 것이고, 웃는 것을 보면 무언가 기쁜 일이 있는 건데 물어볼 필요가 있나요?”
잠시 후 안내자가 그 절의 스님에게 물어보고 오더니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마룻바닥을 치며 울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새 생명이 앞으로 받을 고통을 생각하고 미리 울어주면서 행복을 빌어주는 기도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웃는 것은 집안의 어느 분이 돌아가셔서 이 세상의 고통이 끝났으니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웃으면서 사시길 비는 것이랍니다.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의 표현이지만 공통점은 둘 다 행복을 빌어주는 것으로, 겉모양을 보고 자기 나름의 상식으로 판단하는 것을 깨뜨려야 진실을 알 수 있다는 설명에 모두가 공감했습니다. 그렇게 조금은 장난 섞인 질문을 한 것이 의외로 깊은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한 사도 베드로처럼 성당에 와서 기도를 드리지만 그 표현 방법에 있어서 사람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정작 주님께서 영원한 말씀을 지녔다는 중요한 사실은 망각하고 고정된 시각으로 표현 방법에 중점을 두고 요구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이해하든지 이해하지 못하든지,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어떤 방법으로 기도를 표현하든지 상관없이 신앙하는 것입니다.
믿고 받드는 것. 그것은 다양성 안에서 진정한 일치를 이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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