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경계(境界)안에서의 삶" ... 2007.5.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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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07-05-02 | 조회수460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7.5.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사도12,24-13,5ㄱ 요한12,44-50
"경계(境界)안에서의 삶"
참 자기를 아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성 베네딕도 규칙 해설 부분의 다음 대목이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결코 건설적이거나 창조적이거나 생명을 주는 삶이 될 수 없다(A life without boundaries can never become a life that is constructive, creative, or life-giving).’
정주와 봉쇄의 삶의 중요성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성당 안에서 창문 밖 풍경을 보면서도 공감하는 진리입니다.
큰 유리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 얼마나 많은 영감과 깨달음을 주는 지요.
바로 밖의 환경을 한계 잡아 주는 사각의 유리창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 신기한 것이 창문 없이 바라보는 풍경들에서는 별 영감을 받지 못하다가, 마치 살아있는 동양화 한 폭 같은 사각의 유리 창문 풍경을 통해서는 무수한 영감에 많은 시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방이 모든 것을 너에게 알려줄 것이다.’
참 나를, 제자리를 깨닫게 해 준다는 깊은 진리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내 삶의 경계와 한계를 확인하고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경계를 마구 유린하면서, 아예 경계 개념 없이 제 멋대로, 욕망 따라 살지는 않습니까?
이런 경계의 제약 없이는 절대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 날의 교육이 지닌 큰 맹점입니다.
아무리 지식 많고, 머리 좋아도 경계 내에서의 절제와 집중된 수련의 삶이 없으면, 아무도 통제 못하는 야수와 같은 무서운 사람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 내의 정주와 봉쇄 생활은 이런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경계 내에서의 인내와 절제, 집중의 삶이 없으면 내적 평화도 없고, 그 삶이나 생각, 절대로 깊어지지도 새로워지지도 않습니다.
현대인들의 밖으로의 욕망 따른 자유분방한 삶이 점점 생각 없는, 가볍고 얕은 천박한 삶으로 이끌어 가지 않습니까?
답답한 사막 같기도 하겠지만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샘솟는 우물이기도 합니다.
진정 정주의 삶을 사는 공동체라면 세월 흘러가면서 더욱 깊이를 더해 가는 맑은 사랑 샘솟는 우물이 될 겁니다.
실은 공동체의 우물에서 길어내는 샘물 같기도 합니다.
만일 제가 공동체에 머물러 정주하지 않고 경계 없이, 자유로이 밖으로 나다닌다면 내면의 샘은 고갈되어 도저히 매일 강론을 퍼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설명이 장황해 졌습니다.
사도행전에서의 바르나바와 사울이 하느님의 말씀을 힘차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안티오키아 교회 공동체와 성령의 경계 내에서, 욕망 따른 삶이 아니라 성령에 따른 삶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자신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예수님이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바로 예수님의 경계이자 뿌리임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습니까?
역시 우리의 경계도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확연히 깨닫게 됩니다.
깊이 보면 우리의 봉쇄 구역은 생명의 샘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임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정주의 경계 내 생활에 충실하도록 우리에게 풍부한 은총을 주십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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