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362) 수세미 단상(斷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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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정자 | 작성일2007-05-07 | 조회수699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온지도 어언 3년이다. 재건축하고 있는 우리 아파트가 거의 다 완성되어 아마도 8월경에는 입주할 것 같다. 너절한 살림살이들은 지금부터 차근차근 선별하여 버리고 최대한 이삿짐을 줄일 수 있는데까지 줄여야한다는 생각이다. 지금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이 같은 평수임에도 훨씬 넓어 새 집에 집어넣기엔 복잡할 것 같아서다.
그런데 이사를 앞두고 벌써부터 고민거리가 있었다. 이 집으로 이사오고 나서 무엇이 그리 바쁜지 냄비, 밥통, 찜통을 한번도 닦지 않아 너무 더러운데 그대로 이사가려면 아무래도 짐 나르는 사람들에게 너무 창피할 것 같아서다. 세상에 이렇게 게으른 여자도 있나? 할 것 같아서다.
그렇다고 닦으면 멀쩡할 그릇들을 버릴 수는 없고 닦자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 때가 낀 그릇들을 어떻게 닦을까 노상 걱정만 하고 있었다. 찜통은 정신이 깜빡깜빡하여 고구마 찌다 태워먹고, 빵이나 떡을 찌다 태워먹기를 여러번 반복하여 안팎으로 새까맣게 돼버렸다.
늘 생각만 하고 딴짓은 할망정 시작을 못하고 있던 차에 며칠전 백화점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난전에서 어떤 아저씨가 까맣게 때가 긴 그릇을 수세미로 닦으며 선전을 하고 있었다. 슬슬 문질러도 때가 감쪽같이 닦여져 스텐레스 그릇이 반짝거리는 거였다. 일본으로 수출되는 수세미라고 했다. 포장지에 일본말이 쓰여 있었다.
철쑤세미로도 닦이지 않는 때가 그 수세미로 닦으면 그렇게 번쩍번쩍 광이 날 정도로 벗겨진다고 하는데, 아닌게 아니라 앞에 죽 늘어놓은 스텐레스 냄비와 솥들이 반짝반짝 그렇게 깨끗하고 광이 날 수가 없었다.
내가 긴가민가 하여 손으로 때가 낀 후라이팬 밑바닥을 손으로 문질러 보니까 이 아저씨 내 의중을 알아챈 듯 " 나 여기서 팔년째 장사하고 있어요." 한다. 그런데 그 길을 가끔 지나다니긴 했어도 아저씨를 본 기억은 없다. 그날은 아마 내가 몹시도 그릇 닦기에 골몰하던 때여서 그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나보다.
두 개에 3천 원이라 한다. 원래는 한 개에 3천 원인데 두 개씩 준다고 한다. 보통 녹색빛깔 나는 수세미가 6,7백원씩 하는 걸 생각하면 비싸기는 했다. 하지만 너무도 힘 안들이고 닦이는 그 수세미를 마다하고 갈 수가 없을 만큼 내 사정이 급했다.
양손에 굴비 한 두룸(20마리)과 몇가지의 식품 봉다리를 무겁게 들고 있는 내가 짐을 내려놓고 가방을 열어 돈을 꺼내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그 수세미를 산 것은 한시바삐 그릇들을 닦아야겠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다음날 그렇게도 손을 못대던 그릇들을 수세미로 닦기 시작했다. 뭐 힘안들이고 닦을 수 있다는 생각에 쉽사리 시작을 한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아저씨처럼 슬슬 문질러선 택도 없었다. 젖먹던 기운까지 필사적으로 문질러야 조금씩 때가 벗겨지는 것이었다. 에구... 또 속았구만.....
그 남자가 일반 쑤세미와 비교한다며 조그맣게 뜯은 녹색수세미로 후라이팬을 엎어놓고 밑바닥을 문지르며 "이것보세요, 세상없어도 안닦이죠? 그런데 보세요, 이 수세미는 잘 닦이잖아요?" 하며 시범까지 보였는데, 웬일인가?
생각해보건대 그 남자가 시범을 보여주던 녹색수세미는 이미 여러번 사용하여 부들부들해진 데다 물을 묻혔던 것 같다. 여러번 사용하여 부들거리는 쑤세미에 물까지 묻힌 수세미로는 아무리 그릇을 닦아도 때가 벗겨지지 않는다.
그리고 빳빳한 새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이렇듯 기를 쓰고 닦으면 어느 그릇인들 안닦이고 배기겠는가! 힘 빼지 않고 닦으려고 그 수출용 수세미를 산 건데... 그리고 그 남자의 그릇에 끼어 있던 때는 아무래도 살짝 입혀진 눈가림의 때였던 것 같다. 그래서 사실은 손으로 그 때를 만져보았던 것인데, 그걸 눈치채고 그 남자는 믿어도 된다는 뜻으로 그곳에서 팔년 째 장사하고 있다 하지 않았는가. 에이! 헌데 사기꾼한테 속아 이 꼴이 뭔가 말이다.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구.....
돈 삼천 원이 아까운 게 아니다. 그 사람도 한 집안의 가장일 터, 벌어먹고 살아야지. 어쩌면 내심으론 속는셈 치자 하는 마음도 아주 쬐금은 있었으니까. 다만, 그래도 힘 하나 안들이고 닦을 줄 알았던 한가닥 기대가 무너져버려 허탈한 것이다. 결국은 힘 뺄 것 다 빼고서야 그릇의 때를 벗겼다.
일을 호랭이보다 더 무서워하는 나지만 일단 시작을 하기만 하면 끝장을 보고 마는 게 내 성격이다. 몇 시간 동안 냄비 세 개, 밥통 세 개, 찜통 한 개를 깨끗하게 벗기고 나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숨을 헉헉거리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누구를 탓하랴! 사기를 친 건 그 남자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힘 하나 안들이고 그 켜켜로 낀 묵은 때를 거저 벗겨보겠다는 심사가 사깃꾼이 아니고 무엇인가. 도둑놈 심뽀가 아니고 무엇인가.
결국 그 남자가 나를 반성시켰다. 이 세상엔 결코 공짜가 없다는 걸 일깨워 주었으니....
그리고 반짝거리는 그릇들을 바라보자니 이제 이사가는 날, 남부끄럽지는 않겠구나 싶어 비로소 무거운 짐을 벗은 듯 홀가분해졌다. 그러고보면 그 남자가 내게 똥개 훈련을 시킨 게 아니라 제대로 훈련을 시킨 셈이다. ㅎㅎㅎ......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도 싶어진다.
그 두 개의 수세미는 그릇 일곱개를 닦고나니 부들거려 그나마 이젠 아무리 힘을 주어도 더 이상은 닦이지 않는다. 다음엔 시장에 가서 녹색 수세미를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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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을 해봅니다>
요즘 내 모습이 때가 잔뜩 낀 우리집 그릇 같습니다. 레지오는 진작에 그만 두었고 구역반장도 벌써 내놓았고 평일미사는 아예 가지 않고 주일미사도 빼먹을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자세가 정말 이래선 안되는데.... 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집 그릇들은 이제 깨끗해졌는데, 내 마음을 덮고 있는 때는 언제나 벗겨질려는지..... 정말로 수세미가 필요한 건 바로 내 마음인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정작 주님께 부끄러워해야 할 내가 이삿짐 센터 사람들만 신경 쓰고 있으니 정말로 한심하단 생각마저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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