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믿음의 효과 ... 차동엽 신부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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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은숙 | 작성일2007-06-25 | 조회수1,263 | 추천수10 | 반대(0) 신고 |
참 믿음 산사체험을 꿈꾸는 그리스도인 요즈음 불교 사찰에서 주관하는 ‘산사체험’(Temple Stay)이라는 것이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최근 언론보도에 의하면 그 지원자 5명 중 1명꼴이 크리스천이라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단순한 호기심과 영적 갈증이 합작으로 빚어내고 있는 현상일 터이다. 이 통계를 접하는 순간, 필자에게는 언뜻 두 가지가 밀려왔다.
먼저 난데없는 추측이 거의 결론처럼 뇌리를 스쳐왔다. “아마 그 중 대분분이 가톨릭 신자들일 거야. 보나마나지.” 꼭 확인해봐야 할 일이겠지만, 평소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 약한 정체성으로 여기 저기 방황하고 있는 가톨릭 신자들을 많이 봐 왔기에 불쑥 들었던 짐작인 것이다.
거의 동시에 씁쓸한 기분이 마음 한켠에서 느껴져 왔다. 대림절과 사순절 특강을 다니면서 거의 모든 본당에서 느꼈었던 슬픔이 상기되었기 때문이다. 거의 50대 이상의 고령자들로 가득 메워진 성당에서 안타까움으로 다가왔었던 40대 미만신자들의 그 ‘빈자리’가 대조적으로 더욱 허전하게 절감되었기 때문이다.
연신 떠오르는 물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대체 교회를 떠난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이미 40%대를 육박하고 있는 쉬는 교우들, 그리고 해마다 평균 10%대에 이르는 40대 미만 교회 이탈자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영적 목마름을 채우며 지내고 있을까?”
중심(中心)
중심이 그립다. 중심을 지닌 이들이 그리워진다. 다원주의 시대에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그리움이냐고 반문하는 이가 있을 터이다. 괜찮다. 필자도 한 때 소위 지성인(知性人)의 고뇌로서 다원주의적 모색의 과정을 밟아봤다. 하지만 필자는 깨달았다. 다원주의는 지평의 확장이 아니고 방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원주의는 절대진리를 향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마치 고대 그리스에서 저 궤변론자(소피스트)들의 시대가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진선미(眞善美)를 추구하는 보편철학의 시대에 의해 극복되었듯이 말이다.
문화와 진리는 다른 것이다. 문화에는 다원주의가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이 현상이다. 하지만 진리에는 다원주의가 통하지 않는다. 문화에는 답이 여러 개 있을 수 있어도, 과학내지 철학에는 답이 여러 개 있을 수 없다. 답이 여러 개인 듯이 보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답은 하나로 귀결되게 되어 있다.
여기서 결정적인 물음이 하나 생긴다. 그렇다면 종교는 문화인가 과학인가? 종교와 이웃 사촌인 철학은 문화인가 과학인가? 이 물음은 딱 부러지게 답을 할 수 없는 물음이다. 종교건 철학이건 문화적인 요소와 과학적인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밀히 파헤쳐 보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곧 “종교와 철학의 알맹이는 과학에 속하고, 그 껍데기는 문화에 속한다”고 말이다. 그렇다! 종교와 철학은 원리, 법칙, 진리를 지향하고 탐색한다. 그런데 형식적으로는 문화라는 옷을 입고 나타난다. 바로 이것이 딜레마인 것이다. 곧 일정부분에서는 상대(=다원)주의를 수용하되 그 중심에서는 절대주의를 견지해야 하는 이중적 당위가 종교와 철학이 안고 있는 과제인 것이다.
겉으로는 같은 돌로 보여도 언젠가는 옥석(玉石)이 분명히 가려지게 되어 있다. 모든 돌이 다 옥돌은 아닌 것이다. 돌, 모조 옥, 진품 옥이 언젠가는 드러날 터이다. 진리에 관한한 우리는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예수가 그리스도이다”라고 증거하던 사도들을 죽이려 하는 예루살렘 지도층을 향해 율법교사 가믈리엘이 무서운 말을 하였다.
“이 사람들의 계획이나 행동이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여러분은 그들을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지도 모릅니다”(사도 5,38-39).
참 믿음
어떤 믿음이 참 믿음일까? 이는 어느 종교가 옳으냐 그르냐를 가름하기 위한 물음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추스르기 위한 물음이다. 답을 대신하여 한 가지를 강조한다면 “참 믿음은 잘못된 하느님상을 버리는 믿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으면서 잘못된 하느님상(像)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억압하고 전쟁을 이끄는 것보다 차라리 어떤 하느님도 믿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종교가 인간의 잘못된 욕구 충족의 시녀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비단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이 제일 질색으로 여겼던 것이 바로 저런 행위들이었다. 곧 우상 숭배였다. 우상(偶像)에 대해서 바로 알 필요가 있다. 우상은 틀 없는 하느님께 틀을 지우는 행위를 말한다. 잘못된 하느님상을 가지고 그것에 하느님을 가두어두는 것,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형상도 없고 제한도 없는 하느님께 ‘틀’을 지우는 것, 그것이 우상이다. J. 아리아스 신부는 「내가 믿지 않는 하느님」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잘못 믿기 쉬운 하느님상을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그렇다. 나는 이러한 하느님을 결코 믿지 않는다. […]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울먹이며 말하는 정직하고 신실한 한 인간이 시달리고 있는 심각한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주지 못하는 하느님. 물질을 죄악시하는 하느님. […] 카인의 새 후예를 계속 축복하는 하느님. 마술사와 요술쟁이인 하느님. […] 특정한 교회, 특정 종목, 특정 문화, 특정 계층이 독점하도록 허용하는 하느님. […] 손에 쥐고 있는 법조문에 따라 항상 판결을 내리는 심판관 하느님. […] 사람들의 서툰 실수를 보고 미소 짓지 못하는 하느님. 단죄하기를 ‘즐기는’ 하느님. 지옥에 ‘보내는’ 하느님. 기다릴 줄 모르는 하느님. 시험 때 항상 만점만을 요구하는 하느님. […] 총명한 사람, 조리 정연한 이론에 밝은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해되는 하느님. 자기 집 문 밖에서는 굶주림과 비참이 심한데 집안에서는 포식하는 부자들로부터 흠숭을 받는 하느님. […] 계속 약탈하고 비방을 일삼으면서도 미사 참여하러 가는 이들에게 흠숭을 받는 하느님. […] 정의를 실천하지 않는 이들의 선심을 흡족하게 여기는 하느님. […] 인간과 사랑에 빠질 줄 모르는 하느님. […] 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하느님. 자신의 모친을 사람들에게 어머니로 기꺼이 내어주지 않는 하느님. 온갖 절망 속에서 내가 희망할 수 없는 하느님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렇다. 나의 하느님은 전혀 다른 하느님이시다.”
나는 어떤 하느님을 믿고 있는가?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인가, 아니면 내가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 하느님인가? 생각속에 잠긴 예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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