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7.7.12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창세44,18-21.23ㄴ-29;45,1-5 마태10,7-15
"삶의 비전"
비전이, 희망이, 삶의 의미가 있어야 삽니다.
아무리 환경 좋아도 이들이 없으면 내면은 캄캄한 지옥입니다.
묵상 중 문득 떠오른 말입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
이게 바로 사람입니다.
같은 동물이면서 인간과 짐승을 결정적으로 갈라놓는 것,
삶의 의미를 찾느냐의 유무입니다.
하늘 보며 살라고 두발의 직립인간입니다.
삶의 비전, 삶의 의미, 삶의 희망을 추구하는 자유일 때
사는 기쁨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 의식주 생활 보장돼도
이런 비전이나 희망 없는 삶,
금방 타성에 젖게 되고 본능의 욕망 따른 무기력한 삶으로
내면도 서서히 무너집니다.
몸과 마음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반면 아무리 살기 힘들어도
이런 비전이나 희망 또렷하면
영육은 깨어있게 되고 활력 넘치는 삶이 펼쳐집니다.
우리 삶의 비전이자 희망, 의미는
두말할 것 없이 하느님이자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을 찾는 삶,
끊임없이 우리의 참 비전이자 희망인
하느님을, 하느님의 나라를 찾는 삶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이는
하느님의 마음에 들고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로마14,17-18).
하느님 나라의 비전 생생할 때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예수님은 물론 사도들의 생생한 비전은
바로 ‘하늘나라’였음을 봅니다.
사도들처럼 하늘나라 비전 지닐 때
우리는 그대로 하느님 능력의 통로가 되어
마귀는 쫓겨나고 병은 치유되며 죽었던 감성은 살아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무집착의 자유로운 삶을 삽니다.
끊임없이 흐를 때 맑은 물이듯,
거저 받은 모든 은총의 선물들,
끊임없이 거저 나눌 때 비로소 깨끗한 마음입니다.
바로 여기 깨끗한 마음에서 나오는 참 좋은 선물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우리 삶이 답답하고 어두운 것은
비전의 상실, 삶의 의미의 상실에서 기인함이 대부분입니다.
하느님 비전 생생할 때 하늘 향해 활짝 열린 자유롭고 단순한 삶입니다.
오늘 1독서 창세기의 요셉을 보십시오.
과연 감성과 믿음을 겸한, 참으로 매력적인 남아대장부입니다.
그 엄청난 파란만장한 시련의 여정 중에도
생생한 하느님 비전 지녀
하느님의 섭리를 읽고 그에 충실했기에
고진감래의 열매를 맛보는 요셉이 아닙니까?
마지막 구절의 감동을 나눕니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원망은 고사하고,
오히려 형들을 위로하는 요셉의 관대한 마음,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 같습니다.
시련의 어둠의 여정 중에도
별빛 같은 하느님을 비전을 지니고,
하느님의 섭리를 읽고 살았기에 이런 관대한 마음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위로를 체험할 때
진정 이웃을 용서하고 위로해 줄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 비전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의미이자 희망입니다.
이런 하느님 비전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찾으면 나타나고 찾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와 끊임없이 바치는 성무일도 시간,
우리의 하느님 비전을, 우리 삶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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