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허무속의 진주 / 이인주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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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07-08-09 | 조회수800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허무속의 진주
코헬렛(전도서)의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엘렛1,2) 마치 허무론자의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인생무상을 논하는 것이긴 하지만, 인생에 있어 욕심을 내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제대로 깨달으라는 의미이다. 즉 인생무상을 넘으려거든 코엘렛이 주장하는 인생의 참 진수를 화두로 놓고 깨쳐 보라는 것이다. 그건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느님 나라의 진수를 터득하지 않고는 알아질 없는 것이리라.
진시황제나 알렉산더 대왕 같은 사람들이 코헬렛을 좀 미리 접했다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진시황제는 자신의 죽음 앞에 더 살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탐라 오늘의 제주도 까지 사람을 보내 불로초를 구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헛되고 헛된 것으로 끝난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안 되자. 무덤 속에 자신이 사용하던 물건과 산 사람까지 함께 장사를 지냈고, 수많은 군사와 말의 모형을 함께 묻게 한 것이 병마용이다.
진시황제가 하늘나라의 신비를 조금이라도 깨달았던들 그런 짓을 했겠는가? 이런 모습을 보면 유교나 도교 사상에 천의 개념이 약함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허기야 진시황제 뿐이랴, 서양의 대왕 알렉산더 또한 폭군으로서 자기 맘대로 한 것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래도 그가 죽기 전에 양심은 있어 이렇게 이야기 했던 것은 참으로 신기할 정도이다. “나의 장례를 치르되 손은 내 놓아라.”그 이유는 천하를 호령하던 알렉산더도 죽음 앞에선 헛되고 헛됨을 선언한 것이다. 자신의 묘를 와 보면서 천하의 알렉산더도 가지고 가는 것이 없으니, 산 사람들이여 너무 아등바등 살지 말라는 엄청난 교훈이다.
사람이 좀 일찍 깨달아 죽기 전이 아니라 자신이 모든 권력을 행사할 때 그렇게 한다면 얼마나 좋으냐 말이다. 그렇다면 우린 지금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알았는데 안 됨은 뭘 의미하나, 그건 실행함이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그럼으로 깨달음이란? 자신의 힘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됨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앎과 깨달음이란 자신의 노력도 있겠지만, 그 노력이란 것은 바다가 모래 한 알에 지나지 않고, 하느님의 무한하신 은총 속에서 깨달음은 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함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은총이란 의미가 주는 것이 얼마나 넓은지, 그 은총이 한 순간에 잡혀지는 것이라면 참 좋은데 그것을 잡음이란 하느님을 꿈속에서 만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듯이 나의 노력이 하늘을 찌르면 은총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차원 보다 더 포근하게 내 곁에 내려옴을 믿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렇게 가르쳐 주어도 또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니 이걸 어쩌란 말인가?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싶다. 그래 99섬을 가지고도 100섬을 채우고 싶어 1섬 가진 가난한 이를 등치려 한다. 그러자 가난한 이가 주긴 주는데 100섬을 채울 곳간이 없어 부랴부랴 큰 곳간을 급히 짓다 과로로 쓰러진다. 100섬 아니 만섬의 부자이면 뭘 하나. 이미 하느님께서 부르고 있는데, 허나 하느님이 부르면 다행인데 번지수가 다르니 그게 문제로다.
이때 딱 맞는 말이 바로 코헬렛의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는 것이다.
코헬렛의 헛됨을 깨달았다면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의 진복팔단도 나름대로 납득이 될 것이며, 그 안에서 깨달음이 깃들 것이다. 그러니 너무 지나친 부유함에 자신을 빼앗기지 마라. 좀 가난하고 헐벗는다 해도 깨달음이 전달되어 자신의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으랴. 물론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워 매일 징징댄다면 그것 또한 올바른 일은 아닐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늘이 주는 기쁨에 나를 맡기며 살 수 있는 내가 되도록 나를 깨어 있도록 사랑하자.
그러면 청빈 속에서도 참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허무 속의 진주를 발견한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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