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사이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마침 예수님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는데 예수께서는 그를 고쳐주셨습니다(14,2-6). 수종을 앓는 사람도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은 사람입니다. 14장 12절로 미루어 보아 그는 바리사이의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이 새롭습니다.
바리사이의 초대는 고상하고 품위있는 자들의 화려한 파티를 연상시킵니다. 이런 모임에서는 어느 자리에 앉는지가 아주 중요합니다. 지위의 서열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지요. 예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떤 자리에 앉으셨을까요? 당연히 윗자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구간에서 시작하지 않으셨습니까?
윗자리를 고르는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보이기 위해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격이지요. 11절까지 ‘자리’라는 단어가 여섯 번이나 나오지만 이는 자리에 대한 가르침이라기보다는 근본적인 마음 자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른 이들을 배려하여 끝자리에 앉는 마음을 가져라. 그러면 결과적으로 영광이 돌아온다.’는 말씀이겠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4,11) 겸손은 자기 비하나 비굴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명확하게 아는 자기 인식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라고 한 것은 자기 비하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자신의 자리에 당당하게 똑바로 서 있는 겸손한 자의 말입니다.
따라서 높아지기 위해서 일부러 낮추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면 하느님께서 높여주십니다.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20,23) 섬김을 받기 위해 먼저 섬겨야 하는 논리와 같습니다.
음악회나 연극 그리고 운동경기 등을 관람할 때는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면서도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면서 천상 양식이 마련된 미사의 초대에는 서로 다투어 앞자리에 가지 않습니다. ‘금총’을 받는 앞자리라는데도 굳이 뒤에 남아 있는 것이 겸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아마도 미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까닭이겠지요.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히브 12,22-23ㄱ)
이어 예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2ㄴ-13)
코린토 교회에서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는 자리가 일치보다는 분열을 일으키자 사도 바오로는 이를 꾸짖었습니다(1코린 11,17-34). 좋은 음식을 가지고 먼저 와서 배부르게 먹고 술에 취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늦게 온 이들은 배가 고픈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1코린 11,22ㄴ)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에게 좋은 자리를 내놓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서 있거나 발판 밑에 앉으라고 하는 차별 대우를 하지 않도록 경고합니다(야고 2,1-4). 좋은 차를 몰고 오면 깍듯이 경례하고, 허술한 차를 몰고 오면 무시하는 오늘의 세상살이가 예전보다 더 나아진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결혼식에 갈 때 부조금을 내고, 상갓집에는 조의금을 냅니다. 큰일을 치르는 집에 목돈이 필요할 것이니 조금씩 돈을 내어 돕자는 아름다운 취지였습니다. 그러면 가난한 집에는 많이, 부유한 집은 적은 금액을 부조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은데 현실은 반대여서 별 볼일 없는 집은 대충 넣고, 권세있는 집에는 그쪽 체면을 봐서, 또는 나중에 돌아올 것을 생각해서라도 적은 액수를 봉투에 넣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가치관과는 영 다르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Pay It Forward(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에서 갓 중학교에 입학한 트레버는 사회 시간에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꿀 방법을 생각해 일 년 동안 실천하라는 숙제를 받습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트레버는 심사숙고 끝에 괜찮은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자신이 누군가 세 사람을 도우면 그 세 사람은 각각 또 다른 세 사람을 돕게 되고 그 아홉이 다시 각각 세 사람을 돕고`…. 그러다 보면 ‘사랑 나누기(Pay It Forward)’ 운동이 세상으로 퍼져 나갈 거라고 생각하면서 자기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한테 이를 실천합니다.
가이드 포스트에 실린 또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유료 주차장에서 앞차가 뒤차 주차비까지 지불하였습니다. 뒤차는 또 그 뒤차의 것을 지불하였는데, 맨 마지막 차에는 그날 주차료를 걱정하면서 딸아이를 데리고 온 어머니가 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이가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는 발레를 보여주기 위해 돈을 모아 표를 샀지만 주차료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차를 몰면서 하느님께 기도하였는데 그 기도가 이렇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되돌려 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들에게 베푼 것이 아니기에 두 이야기 모두 감동스럽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마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