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끌리는 마음 때문에 엉뚱한 곳으로 -판관기10
작성자이광호 쪽지 캡슐 작성일2007-09-25 조회수456 추천수6 반대(0) 신고

끌리는 마음 때문에 엉뚱한 곳으로 -판관기10

<생명의 말씀>
 가나안 전쟁을 겪지 못한 이스라엘 사람을 빠짐없이 시험하기 위하여 야훼께서 남겨 두신 민족들이 있다. 그 목적은 대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알아 보시려는 데 지나지 않았다. 일찌기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쟁을 가르치시려는 것이었다. 다섯 추장이 거느린 불레셋족, 온 가나안족, 시돈족, 바알헤르몬 산에서 하맛 어귀에 이르는 레바논산에 자리잡은 히위족이 그들이다. 이들을 남겨 두신 이유는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려는 것이었다. 야훼께서 모세를 시켜 그 조상들에게 명한 계명을 이스라엘이 순종하는가 않는가 알아 보시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족, 헷족, 아모리족, 브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과 섞여 살면서 서로 시집 장가 가다 보니, 그들의 신을 섬기게 되었다. (판관기 3:1-6)


<말씀의 길잡이와 실천>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나안 정복 전쟁이 단기간에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초기에 정복한 지역도 있었지만 정복되지 않은 지역도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한 번에 주시지는 않은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가 오늘의 말씀에 나옵니다.

사람이 한 번에 모든 것을 얻게 되면 도전 정신과 첫 마음을 잃고 타락하기가 쉽습니다. 고난을 견디어 내는 것도 어렵지만 성공과 번영을 견디어 내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되, 주변의 강한 민족들 중 일부는 남겨 놓으셔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의지하여 싸워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모든 일을 한 번에 손쉽게 얻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조바심을 내며 힘들어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을 잘 묵상해 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람에게 큰 복을 일순간에 주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이 내게 큰 복을 주시기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 큰 복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그분이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세상의 것들(부나 명예, 지위 등)과 완전히 결별하고 살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진정한 문제는 세상의 것들과 우리 사이의 관계일 것입니다. 내가 세상의 것들에 주인이 되어 그것들을 활용하면서 거기에 얽매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정신을 잘못 차리면 내가 추구하는 것들에 오히려 내가 예속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변 민족이라는 세상과 접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해 버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주변 민족들을 각성의 도구로 남겨 놓으신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그 본래 목적을 망각하고 그들과 거래를 하면서 혼인까지 하게 됩니다.

정복 전쟁 초기부터 하느님은 가나안 민족들을 모두 죽이거나 그 땅에서 내쫓으라고 하셨는데 어느 정도 살 만해 지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그 명령을 망각하고 만 것입니다. 주변 민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평화롭게 살면 좋은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가나안 민족들이 섬겼던 신들- 바알과 아세라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게 하는 대상은 대체로 폭력과 섹스와 재물이고 사람의 욕망으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끌려 갈 수밖에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정체성이 상실될까를 우려하셔서 가나안 민족을 모두 죽이든가 몰아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혼인은 인간과 인간의 결합 중 가장 강하고 견고한 결합이고 또 둘이 만나 하나가 되기 때문에 두 사람의 모든 것이 하나로 섞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민족들과 혼인까지 했기 때문에 그들의 나쁜 습성과 쾌락과 폭력을 추구하게 하는 그들의 신까지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들어 와 버렸습니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주변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평화와 우호라는 미명 아래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내 정체성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지는 않는가의 문제가 그것입니다.


열심한 신자들끼리 결혼을 해서 한 살림을 차려도 결혼 후 세상에서 헤쳐가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에 주님과 멀어지겠다는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아도 하느님과 자연스럽게 멀어지기 쉬운 게 우리 삶입니다. 그런데 내가 결혼하고자 하는 대상이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결혼 후에 그 사람과 하느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기 쉬울까요?


우리는 상대 이성(異性)에게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서 끌리게 됩니다. 결혼해서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데 신앙의 일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긴 알지만 신자가 아닌 그 남자 혹은 그 여자가 내가 바라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면 신앙이라는 요인 잠시 뒤로 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  사람이 신앙은 없지만 예쁘다 혹은 잘 생겼다, 신앙은 없지만 돈이 많고 학벌이 좋다 등등.. 우리 안에 하느님보다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욕망의 한 요인이 나를 자꾸 신앙 없는 그 사람과 결합하라고 부추길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신앙 없는 사람이 무조건 다 나쁜 사람이라는 얘기는 물론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길)  


우리 신앙인들도 사실 주변의 강한 민족들 틈바구니에서 자기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거래하면서 그들에게 동화될 것인가 아니면 세상과 교류하되 나의 정체성을 지킬 뿐 아니라 그들까지 변화시킬 것인가는 사실 우리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 중 가장 중요한 선택이 혼인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도 저와 지금 결혼해 있는 자매와 교제하고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람 마음 안에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많은 기준들이 있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콕 점찍어 주는 운명적인 배우자는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구요. 배우자의 선택은 하느님 안에서 내가 어떤 기준으로 어떤 선택을 하느냐의 문제이고 사제 앞에서 언제나 사랑의 서약을 지킬 것을 맹세하면 하느님께서 그 두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게 혼배 성사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관점과 기준에서 배우자를 찾고 있으신가요? 내가 가지지 못한 어떤 것 혹은 내가 가지고 싶은 어떤 것을 그 사람이 가졌을 때 '그 사람 믿음은 좀 아닌데...' 하면서 그 사람에게로 끌려 가는 측면은 없으신가요?


상대방을 생각할 때 여러 복잡한 생각이 머리와 가슴 사이를 왔다갔다 할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을 꼭 기억하세요. 내가 가지고 싶은 어떤 것 때문에 상대를 놓치기 싫은 욕망이 갑자기 발동하게 해서는 잘못된 선택을 하기 쉽습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