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낮과 밤이 바뀌는 이유외 2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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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열우 | 작성일2007-12-18 | 조회수483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낮과 밤이 바뀌는 이유 빵보다도, 생명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자유입니다. 빵이나, 생명을 더 가치있게 하는 것이 자유이며,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또한 자유입니다. 신체의 자유는 물론 양심, 의식의 자유도 소중합니다. 가난으로부터의 자유처럼, 부요로 부터의 자유도 요구됩니다. 가난하여 비굴하여지는 부자유 못지않게, 부요하여 안하무인이 되는 부자유도 스스로 조차 견디어 내기 어렵습니다. 타인의 우월의식 속에 무의식적인 지배를 받게되는 것을 억울해 하면서, 자신역시 자신보다 좀 못한 사람에게 우월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 또한 못마땅합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고서,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인간의 한계가 못마땅한 것입니다.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자유를 희구하면서- 자신도, 남도 모두 자유롭게 살아갈 사회를 꿈꾸는 것이 민주사회 입니다. 선거 때가 되면, 후보들은 행복한 세상을 만들 최상의 공약을 내세웁니다. 우리가 그 분들에게 구하는 최선의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것이 법안에서의 자유일 것입니다. 권세의 특혜 아래, 부당한 그늘이 없는 밝은 세상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가 뜨고 지며, 낮과 밤, 양지와 그늘이 서로 바뀌도록 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태양의 혜택을 지나치게 받는 곳은 사막이 되어버리고, 태양의 혜택을 잘 받지 못하는 극지방은 얼음에 덮여 있습니다. 부나 권세, 명예 등이 어느 한 쪽에 오래도록 집중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굳어져 애초 지녔을 법한, 인간 본성의 선량과 순수는 어느새 사라져 간 곳 없고, 법도 양심도, 죄의식도 없는 괴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07년 12월 14일 21시 16분 8초 낙원에서 생긴 일 자신을 위하여 아무런 땀을 흘리거나 수고를 하지 않아도 전혀 어려움 없이 잘 살수 있는 곳- 마냥 편하고 걱정 근심이란 없는 곳- 태초의 인간에게 주어졌던 낙원이며, 첨단 과학 문명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향수하는 낙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수고하고 땀을 흘려 얻은 소산이 아닌, 거저 주신 하느님의 은혜로 무한정의 복락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었던 낙원보다는 또 다른 세상을 꿈꾸었고, 마침내는 애초, 자신들의 꿈꾸었던 대로, 혹은 그 반대였든, 또 다른 인생의 장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낙원을 버리고(잃고) 고난의 바다로 뛰어내린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의 어리석은 순간의 실수라고만 할 수는 있을까요? 모든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또 다른 세계를 향한 탐구심을 영원히 잠재울 수 없는 것이라면, 그의 후손 그 어느 시대에서라도 이와 같이, 또 다른 세계를 꿈꾸고 시도하기를 중지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거저 얻어진 은혜에 만족하거나, 안일에 빠져 영원한 시간을 보낼 만큼 고요하지만은 못합니다. 실수를 하더라도 끊임없이 시도하고, 시행착오를 연발하더라도, 넘어지더라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서며, 모험과 도전이 아니면 즐겁지 않기 때문입니다. 땀을 흘리며 거두는 소산보다, 어느 날 갑자기 일확천금을 한 것을 누리는 것이 더 힘이 들고 인생을 병들게 합니다. 갑자기 크게 자란 나무는 무르고, 키가 부쩍 부쩍 크는 아이는 뼈에 무리가 가서 성장통을 앓게 됩니다. 밀가루가 베이킹 파우더와 잘 섞이지 않은 빵은 고르지 않고 커다란 구멍이 숭 숭 뚫려있기도 합니다. 수고없이 잘 지내던 낙원에서 저지른 일이란, 하느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느님처럼 될 것이라.’ 는 사단의 말에 생명을 내걸고 투자할 정도의, 우를 범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에덴에서 내어 보내시어 가시와 엉겅퀴가 돋는 땅에서, 땀을 흘리며 스스로 일하여 수고로 얻어진 것에서 기쁨과 보람을 얻도록 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스스로 노력한 땀과 수고의 산물이 아니면, 의미나 가치, 보람이나 기쁨을 얻을 수 없고, 나태와 빗나간 사고의 발상지가 될 뿐입니다. 정의의 산물이 아니면 배부르지 않고, 남의 것을 대신 가로챈 불의의 산물은 호의 호식으로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노력과 수고, 땀의 가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의와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 정도를 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끼친 부산물- 오만과 아집은 혜안을 가리워, 올바른 이치를 깨닫거나, 분별하지도 못하게 합니다. 눈이 900냥이라는 말도 있듯이, 눈이 어두워지는 이상의 재앙도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영원한 생명을 잃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청년이 많은 돈을 벌어 금의 환향하여 돌아왔으나 부모님은 출타 중이었고, 청년은 여독으로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출타중이든 청년의 부모님이 돌아왔으나, 돈에 눈이 먼 그들은 사랑하는 아들은 채 알아보지도 못한 채, 가득 든 돈 가방을 차지하려고 청년을 죽이고 말았다는, 유년 주일학교 시절 들었던 예화가 생각이 납니다. 돈에 눈이 어두워져, 자신의 아들을 죽이기에 이른 비극의 이야기 입니다. . 진정한 가치의 분별, 인간 본연의 순수함을 지키게 하는 지혜와 혜안이 가리워져 짐승과 같이 됨은, 바로 수고하지 않고 부당한 이익을 가로챈 당연한 대가가 아닐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위하여, 모독과 매맞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피와 땀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흘리시는 수고의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자신의 죄악의 대가를 대신 질머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고와 고난에 다소나마 동참하는 그 때- 우리가 낙원에서 진정한 낙을 누리며 살, 희망의 시간이 아닐까요? 07년 12월 17일 17시 37분 27초 본능과 분별력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께서 지으신 것이니, 본능이 시키는 것은 모두 선하며, 그가 가르쳐 행한 어느 것도 죄악이 될 수 없다.’ 는 착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먹으면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열매의 나무를 사람이 보이는 곳에 두신 것- 맛있는 것을 느끼게 하는 미각, 지혜를 얻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도록 하는 시각, 악마의 유혹을 들을 수 있게 하는 청각, 모두 하느님의 창조 목록 중의 하나이니, 면죄부가 될 법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을 발동시킨 본능은 면죄받지 못하고, 저주와 사망의 단죄를 받았습니다. 사람의 죄악은 본능 속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선을 행할 의지나 능력도, 악을 행할 의지나 능력도 사람의 본능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본능을 믿거나 지표로 삼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됩니다. 본능 속의 감정과 이성, 양심과 법, 선과 악을 분별하고, 하느님의 말씀과 법을 지표로 삼아야 합니다. 인간의 본능은 육을 이롭게 하는 쪽의 편을 듭니다. 그러나 이성과 양심은 영혼과 정신의 평안과 자유를 얻는 방향을 제시합니다. 알고도 행한 사람은 많이 맞을 것이요, 모르고 행한 사람은 적게 맞을 것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다소 경하기는 하지만, 알지 못하고 범한 과실도, 알고 범한 고의와 같이 처벌을 받습니다. 본능이 가르치는 일이라고 면죄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택하고 행하는 것이라 해서 면죄의 대상이 될 수도 없습니다. 몇 몇의 선동과, 지각과 이성없는 다수에 의해, 정의와 선은 불의와 악에 주인의 자리를 내어놓고, 하느님의 아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습니다. 천국은 비둘기와 같이 순결함과 동시에 뱀처럼 슬기로운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선과 악, 법과 불법, 정의와 불의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낙원 에덴을 소유할 자격조건은 사리분별 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의 말씀과 사단의 말, 영원한 생명과 순간 사라질 것들에 대한 가치분별 입니다. 법과 불법, 정의와 불의의 분별, 말씀과 빵, 뚝배기와 장맛의 분별입니다. 하느님과 선악과의 분별입니다. 성공자들이 뛰어난 분별력의 소유자였다면, 실패자는 분별력에서 뒤진 사람입니다. 천국을 소유할 능력- 본능의 가르침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는 분별력입니다. 가치의 분별이며, 영원과 순간의 분별입니다. 07년 12월 18일 6시 1분 19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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