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05 조회수652 추천수11 반대(0) 신고
 
2008년 1월 5 주님 공현 전 토요일
 

 

 

Nathanael answered him,
“Rabbi, you are the Son of God;

you are the King of Israel.”
(Jn.1.49)

 

제1독서요한 1서 3,11-21
복음 요한 1,43-51
 
 
오늘의 독서와 복음 듣기



지금 우리 성당에서는 ‘성경 하루 한 장 읽기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취지 아래, 평화신문에서 하고 있는 ‘성경 하루 한 장 읽기’를 우리 성당에서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방법은 이렇습니다. 지시되는 성경의 장을 읽은 뒤에, 나눠드린 프린트 물에 나와 있는 가로를 채우는 문제를 풀면 됩니다.

저 역시 이 운동을 교우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요. 어제 문제를 보면서 교우들이 당황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창세기 4장을 읽은 뒤에 풀어야 하는 어제의 문제를 적어 보지요.

창세기 4장 :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을 죽인 후, 주님께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물으시자 ( )라고 하였다.

정답이 무엇일까요? 정답은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답의 글자 수가 꽤 많은데 반해서 가로의 칸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이것이 정답일까 라는 의구심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정답은 가로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들은 많은 고정관념 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나의 머리를 벗어나시는 분, 나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분이라는 것이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런 점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나타나엘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완벽한 사람이라고 평을 받던 바리사이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킨 것은 물론, 사람들의 높은 존경도 받고 있었지요. 그래서일까요? 그는 정작 스스로의 고정관념에 쌓여 있게 되어서, 예수님에 대한 소개를 필립보를 통해서 듣고도 이렇게 말하지요.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자렛은 그렇게 유명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 조그마한 촌구석에서는 유명한 랍비가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나타나엘 스스로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필립보의 말 “와서 보시오”라는 말에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 앞에 나오기 전부터 자신을 쭉 보고 계셨던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면서 그는 드디어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만약 나타나엘이 나자렛에서 좋은 것이 나올 수 없다는 자신의 고정관념을 굽히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며, 이스라엘의 임금님인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겠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사고를 뛰어넘는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자신의 고정관념에 쌓여 있는 한, 예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고정관념에 쌓이지 맙시다.




도둑질과 눈물('행복한 동행' 중에서)

한 소년이 빚을 갚으려고, 형의 금팔찌에서 금 조각을 훔쳐 팔아 버렸다. 빚은 갚았지만 무거운 죄책감 때문에 한순간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렇다고 지은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소년은 두려웠다. ‘도둑질이 들통 나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면 어쩌나, 아버지께서 매를 때리시면 어쩌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병상에 누워계신 아버지가 충격을 받으실까 봐 염려가 되었다. 결국 그 소년은 깨끗하게 자백하여 죗값을 치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반성문을 써서 아버지께 드렸다.

“저는 형의 금팔찌에서 금 조각을 훔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저를 용서하시고 합당한 벌을 주십시오. 저늬 죄 때문에 아버지 자신을 벌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이제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는 글을 다 읽더니 가만히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고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반성문이 적힌 종이를 벅벅 찢어 버리셨다. 아버지의 눈물을 보며 소년은 울고 또 울었다.

이 소년이 바로 인도 독립투쟁의 상징인 마하트마 간디이다. 후에 그는 자서전에 그날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아버지의 구슬 같은 눈물이 내 양심을 정화시켰고, 내 죄를 씻어 버렸다. 그러한 사랑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화살을 맞은 자만이 그 힘을 알 수 있다.”

아들의 순수한 자백을 폭력이 아닌 눈물로 용서한 아버지의 사랑. 그날의 교훈은 훗날 간디가 비폭력 투쟁을 하게 만든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Dear children, let us not love with words
or tongue but with actions and in truth.
(1Jn.3.18)
 
                
Ray of Love - Den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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