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배부르십니까?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마르 6,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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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길 신부(청주교구 봉방동 천주교회)
◆많은 사람들이 늦은 시간 또 외딴 곳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따라왔다.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제자들의 생각은 현실적이다. 각자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해결하고 오는 방법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어리둥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은 나눔의 실천을 가르쳐 주려고 하신 것이다. 풍족한 가운데 나눔이 아니라 부족한 가운데 나눔의 실천이다.
비만·당뇨·고혈압 등 현대의 많은 질병은 먹지 못해 생긴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이 먹어 탈이 난 것이다. 영양은 포화상태인데 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풍족한 먹을거리에도 더 좋은 것을 먹기 위한 웰빙 열풍까지 불고 있다. 그리고 날씬한 몸매를 가꾸기 위한 다이어트 열풍도 한몫 거들고 있다.
언젠가 필리핀에 선교 체험을 다녀온 후배 신부의 말이 생각난다. “오늘날 가난의 문제는 부자가 나누지 않는데 있는 것만이 아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엄격히 차단되어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데 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한 필리핀에서 절실히 느낀 것이라 한다. 부자 동네는 가난한 동네와 엄격히 구별되어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부자 동네는 경비가 철저할 뿐 아니라 울타리까지 쳐 있고 그 안에서 쇼핑과 교육, 여가 생활 모두가 가능했다. 가난이 무엇이고 배고픈 처지가 어느 정도인지 모른 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종교는 ‘단식’을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교회도 일 년에 두 번,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에 한 끼 단식을 의무화하고 있다. 가장 엄격한 종교는 이슬람교인데, ‘라마단’ 기간에는 낮 동안 물조차 먹지 않는다. 이러한 단식행위는 극기와 보속의 의미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배고픈 이들과의 연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배고픔을 알지 못하는 풍요 속에서 살지만 배고픈 이들의 고통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여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단식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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